[박병규 신부] 2월 5일(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에겐 당연한 것이지만, 빛이 되려고 어둠을 거부하거나 소금이고파 다른 것들과 배타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그건 예수가 말한 빛과 소금과는 거리가 있다.

빛은 집 안 사람을 비추기 위함이고, 소금은 맛을 내거나 음식의 보존을 위해 필요하다. 빛은 어둠을 ‘위해’ 필요하고, 소금은 썩어 가고 맛이 없는 것들을 ‘위해’ 필요하다. 빛이 과하면 사람들은 어둠을 찾게 되고, 소금이 과하면 다른 무엇으로 소금의 맛을 떨어뜨릴 것이다.

세상의 불의를 보고 분노를 느끼는 건 쉬운 일이다. 다만, 분노가 어디를 향하는지 뚜렷하지 않으면, 그 분노는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를 일삼는 것이 된다. 세상의 불의가 분노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지라도 분노가 또 다른 불의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엔 늘 민감해야 한다. 주위의 불의에 몰입하다 제 삶 곳곳에 찌들어 비틀어진 불의엔 무감각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고, 그 무감각은 주위의 불의에 대한 맹목적 분노로 덮이고 단단해져 이 시대, 이 사회를 총체적 갈등과 반목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갈등과 반목의 이면엔 예나 지금이나 배고프고, 억압받고, 정의로운 외침마저도 피곤해하는 사회적 약자가 여전히 배고프고 억압받고 갇힌 채 놓여 있다.

▲ 분노가 어디를 향하는지 뚜렷하지 않으면, 그 분노는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를 일삼는 것이 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모두가 얼마간의 불의함을 품고 산다는 사실로 이 시대, 도처에 깔린 부조리에 냉소적 태도를 취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른바 흑백 논리, 내 편 네 편으로 갈라 싸우는 천박한 짓거리는 그만 하자는 말이다. 표적이 된 불의만을 제거할 수 있는 정의로움은 얽히고설킨 사회에선 가능하지도, 또한 가능해서도 안 된다. 예컨대, 박근혜를 내려오게 한 뒤, 이재용을 구속시킨 뒤, 여전히 권력에 취해 있고, 돈맛에 취한 한국 사회는 어찌할 건가. 누군가는 그러더라....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자며 지금의 불의에 망설이고 고민하는 건, 비겁한 것이라고.... 일정 부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의를 외치는 그 순간으로 세상에 종말이 오거나 사람들의 복잡한 관계가 정리되어 모두가 질서정연한 평화 안에 놓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세상은 정의와 불의가 늘 교차되어 부딪히거나 때론 함께 자라 서로의 긴장이 얼마간의 평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마태 13,24-30)

사유하지 않는 정의의 외침은 또 다른 불의를 위한 먹잇감을 던져 놓는다. 불의와의 전쟁으로만 제 존재감을 확인하고, 그 전쟁으로 상처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보듬겠다는 이들은 대개 제 일상의 자리로 회귀하고 나선 사회적 약자를 생산하는 사회 체제를 용인한 채 제 계급과 제 이해관계를 굳건히도 유지해 나간다. 가난한 자리에 불을 질러 놓곤, 자신이 누릴 삶의 자리에서 관망한다. 타 죽는 건, 가난한 자들뿐이다.

한 가지만 기억하자. 우린 사람을 위해 예수를 믿는다. 세상을 그토록 사랑한 예수는 자신을 죽이러 덤벼든 세상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목에 핏대 올려 정의를 외치는 게, 사람을 위해서인지, 제 알량한 가치관의 자랑질인지 되물어 보자. 징계받아야 할 사람도 사람이고, 인간됨의 기본 권리조차 빼앗긴 사회적 약자도 사람이다. 우린 천상의 하느님처럼 완전하지 않다. 각자의 부족함을 채우고 보듬기보다 때리고 쫓아내고 끌어내리는 것은 그리스도교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

사회운동, 시민운동 다 좋다. 해야 한다. 다만, 그리스도교적 사회운동, 그리스도교적 정의의 외침은 십자가의 사랑이 밑바탕이어야 한다. 십자가 아래 함께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가 누가되었건....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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