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2월 12일(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마태오 복음이 말하는 율법의 완성은 예수의 육화에 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온 사실이 율법의 완성이다. 문제는 예수는 유대 율법을 많이도 어겼다는 데 있다. 안식일로 대표되는 유대의 율법에 예수는 저항했다. 밀밭을 지나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추수 행위, 곧 밀 이삭을 뜯는 제자들을 두둔했고, 안식일에 할 수 없었던 치유 행위마저 예수는 과감히 선보였다. 예수는 유대 사회의 율법을 조롱했다.

대개 예수의 이러한 비행(?)을 두고 유대 사회가 율법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졌고, 예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강조했다고 해석한다. 이를테면 율법의 형식과 내용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을 근거로 해석한 것이다. 내용을 빠뜨린 형식 위주의 율법 준수를 비판한 것이 예수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라. 주일 미사 참례하지 않았다고 죄인 취급하는 분위기에서, 우리 중 누구가 주일 미사 하지 않고 가난한 이, 혹은 죄인들과 먹고 마셨다면 누가 호의적으로 말하겠는가. 정치적 이념의 차이로도 서로가 볼썽 사나운 폭력적 대립을 서슴지 않는 분위기에서, 우리 중 누구가 사회적 지탄을 받는 사람을 신앙 공동체에 데려온다면 누가 관대하고 온유하게 그 사람을 받아들이겠는가. 예수의 유대 율법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율법의 정신에 관련된 것만이 아닌, 형식의 준수 여부에 따라 자신 또한 사회적 저항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꽤나 위험한 행동이었다.

▲ 화해.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예수가 말하는 율법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설파하는 율법과는 거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600여 개의 율법을 일상 속에 지켜야 하는, 그래서 일상이 율법 아래 억압받는 삶이 유대 사회였다. 예수는 이런 율법을 듣고 살아간 유대 사회에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이렇게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가 지향한 율법의 가치는 서로의 ‘화해’와(5,23-24) 서로의 ‘연대’다.(5,27-31) 요컨대 예수는 상호 관계성이 제거된 율법적 준거를 통한 어떠한 제약이나 한계, 혹은 명령이나 주장을 거부한다.(5,34-36)

‘예’ 할 것과 ‘아니오’ 할 것은 각자가 가지는 고유성과 정체성에서 도출되는 일종의 ‘제안’이다. ‘제안’은 타자의 합의나 거부를 부추긴다. ‘제안’의 매순간은 타자에 대한 개방성을 염두에 둔, 그 개방성을 근거로 늘 새롭고, 늘 깨어 있는 관계의 창조성을 지향한다. 예수는 이천 년 전 화석이 된 인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일상의 면면에 살아 숨 쉰다. 내가 ‘예’와 ‘아니오’를 선택할 때, 예수의 ‘예’와 ‘아니오’는 주변에 머물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비판과 견제, 혹은 협동과 연대 속에서 기대치 않았던, 계획하지 않았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율법은 그 변화의 결과물이지 변화를 재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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