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월 29일(연중 제4주일) 마태 5,1-12

복음의 행복은 비현실적이라 외면받기 일쑤다. 가난한 게 행복한 것이고, 박해받는 게 하늘나라에 머물 조건이라면 분명 복음의 행복은 대개의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과 거리가 있다.

힐링, 내적 치유 등을 이유로 교회 안팎으로 쏟아지는 영적 모임과 친교 집단은 어떤 의미로 오늘 복음이 말하는 행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힐링 받아야 하는 사람이 십자가 질 수 있을까, 치유 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가난을 지향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 앞에 요즘 유행하는 힐링과 내적 치유는 어떤 답을 내놓을지 사뭇 궁금하다.

우리말 성경의 ‘행복하여라’를 가리키는 그리스말은 ‘마카리오이’(Μακάριοι)인데, 칠십인 역은 히브리말 ‘에쎄르’(אֶשֶׁר)를 ‘마카리오이’로 번역했다. ‘에쎄르’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합당한 응답을 하는 이나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이에 대해 칭송할 때 사용되는 감탄사와 같다.(시편 1,1; 잠언 3,13; 다니 12,12) 이를테면 복음의 행복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규정될 개념이지, 제 삶의 안위를 위한 힐링이나 치유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하느님께 합당한 이를 두고 유대 사회는 ‘아나윔’을 떠올리곤 한다. 세상의 권력과 자본에 얽매여 현실과 타협하며 사는 이들이 아닌, 어떤 경우에도, 설사 그것이 박해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따르는 데 게으르지 않고 그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간 이들이 바로 ‘아나윔’들이다.(시편 37,14; 40,17; 69,28-29.32-33; 잠언 16,19; 이사 61,1)

▲ 그럼에도 우린 행복하다. 아니, 행복해야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하느님의 뜻은 대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자비로 귀결되고,(마태 5,44; 6,12-15; 9,13; 10,24) 세상의 이해관계에 민감한 기득권의 논리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하여,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은 일정 부분 세상으로부터 저항을 불러온다.

불행히도 세상의 저항을 체험하지 않는 일상의 평온함이 신앙생활로 주어지는 열매라고 착각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신자유주의에 지쳐 버린 한국 사회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정의를 세상에 외치라는 예언자적 소명은 꽤나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 힘들었지? 이제 위로 받으렴’이라는 말을 건네는 게, 오히려 신앙적인 것이라 치부해 버린다.

세상의 차별과 체제의 부조리는 여전한데, 그것을 부수고 고치고 다시 세우는 일은 요원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강남 아줌마 최순실을 향한 광장의 외침은 여전히 굳건한 신자유주의의 체제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의 흐느낌이 아닐까, 자조 섞인 질문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우린 행복하다. 아니, 행복해야 한다. 이런 현실이,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분노가, 그 패배가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이 현실이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고, 의로움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힘을 내자, 우리의 외침이 조금씩 열매 맺어 우리의 후손이 조금씩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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