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월 15일(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어린양의 형상은 탈출기 12장과 이사야서 53장의 전통을 담아낸다. 이집트를 탈출하는 밤, 어린양의 피는 이스라엘을 살리고 이집트를 통곡하게 만들었다. 고난받는 야훼의 종으로 대변되는 희생과 침묵은 어린양으로 빗대어 묘사되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예수를 어린양이라 부르며 생명과 희생, 그리고 침묵의 의미를 예수가 살아갈 삶의 가치로 제시한 것이다.

대체 예수의 삶은 무엇인가. 요한의 증언마따나 하늘과 땅을 이어 주는 삶이겠고,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일상에 함께하는 삶이겠다. 그러나 그보다 중한 예수 삶의 본질은 증거였다. 하느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일을 증거해서 우리 인간이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게 예수 삶의 본질이었다.(요한 20,31)

증거의 삶은 예수를 통해 수많은 신앙인들의 숙제였고 권리였으며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증거를 통해 드러나는 건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이다.(요한 3,16-17) 사랑이 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라며 우리는 여전히 예수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칭송하고 있다.

▲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드러나는 건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런데 말이다. 예수가 보여 준 증거의 삶은 십자가 없인 성립되지 않는다. 어린양이 가진 전통적 개념은 예수의 십자가로 구체화되었고 역사화되었다. 그러나 성당이든 교회든 십자가를 중심으로 놓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경배하는 우리에겐 2000년 전 잔인한 유대 사회의 완고함과 로마 제국의 억압을 떠올리는 도구가 십자가란 사실이 일정 부분 불편한 것은 아닌지 되물어 보아야 한다. 지난 시간의 역사일 수는 있어도 제 삶에서 짊어져야 하는 증거의 도구이자 지금 여기서의 희생과 억압을 담아내는 살아 있는 역사로 십자가를 체험할 용기는 있는가 따져 봐야 한다.

제 스스로 계획하고 지향하는 삶의 걸림돌을 십자가라 여기며 하루하루 버티며 사는 것을 증거의 삶으로 인식한 지 오래고, 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면 하느님의 은총이라 여기는 개인주의적 처세를 신앙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데 익숙한 지 오래다. 예수는 다른 이를 위한 사랑으로 죽었고, 그 사랑을 증거했는데 우리는 제 삶과 제 이해관계를 사랑하고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이 제 삶에 끼어들 때는 하느님께 울부짖는다. 우리 말고 예수 혼자 여전히 십자가를 지고 죽어 가야 하는 과거의 시간은 현재 진행이다.

과거의 시간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증거하는 건 어렵지 않다. 우리 삶의 이해관계와 멀리 있으니까. 다만, 예수는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살아 계신다면, 여전히 십자가가 이웃을 향한 사랑의 도구이고 그 속에 신앙의 삶이 유의미하다면, 증거의 삶은 지난하고 때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우린 누구를 위해 사는가. 그 누구가 보이기나 한 걸까.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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