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월 22일(연중 제3주일) 마태 4,12-23

예수가 자리 잡은 곳은 이방인 지역이라고 멸시받던 곳이다. 예수의 선택과 집중은 선명하다. 예수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이 있고 해석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사회 안에 버려진 계층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다.

대개 이사야의 말씀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데 관심이 많은 성경 읽기는 예수를 자비하신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주체로 이해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당연히 우리의 시선은 예수의 권능에 쏠릴 수밖에 없다.

예수의 행보는 이런 시선을 거부한다. 예수의 공간적 움직임은 분명 카파르나움이고, 거기에 머물며 회개를 선포한다. 하늘나라가 이방인 지역에 머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엔 예수와 그 사회 분위기가 서로 만나 이루어 내는 통합적 구조 안에서 읽어 내는 노력이 요구된다.

너무 잘 알다시피, 회개는 ‘돌아서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분히 ‘관계’안에 이해될 단어다. 예수 중심, 그리하여 예수 그가 모든 걸 알아 주고 해결해 주리라는 이른바 영웅주의식 성경 해석은 회개의 ‘관계적’ 의미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갈릴래아 사람들의 처지를 고민하지 않는 예수에 대한 해석은 왜곡이거나 거짓이다.

▲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다',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1626-30)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다시 기억할 것은 십자가형이 사랑, 자비, 용서, 행복을 외친 이에게 합당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의 사랑, 자비, 용서, 행복은 기존 사회의 인식 체제에 어울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예수는 다분히 사회-정치적 저항에 부딪힌 게 사실이다. 예수 자체가 자비하신 하느님과 그 하느님을 저버린 당시 사회 분위기를 함께 담아내는 통합적 구조의 중심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공존이 예수가 아니라, 하느님이 참 인간이 되어 인간이 하느님마저 죽일 수 있는, 그리하여 인간 안에 인간으로 하느님을 산 것이 예수다. 이런 예수에게 우리가 원하는 게 별볼 일 없는 경찰이 지구를 구한다는 식의 영화 속 영웅의 모습이라면 인간인 예수를 여전히 인간 같지 않는, 아니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항변과 같다.

갈릴래아 지역은 순수한 의미에서 이방인 지역이 아니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 안에 차별이 버젓이 성행하는 계급주의적 현실이 예수를 저항의 대상과 처형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수백 억을 주고도 영장이 기각되는, 그러나 돈 몇천 원에 도망의 우려와 증거인멸의 위험이 있다면 즉각 구속하는 이런 나라에서 예수는 여전히 저항의 대상이고 처형의 대상이다. 이 나라, 이 사회의 차별에 맞서 예수처럼 십자가 질 용의가 있는가 찬찬히 묻는 데서 신앙은 시작할 것이다. 우리의 카파르나움은, 우리의 이방인 지역은 재벌 밑에서, 권력 밑에서 신음하는 돈 없고, 백 없는 이들의 삶의 자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를 얻어 만날 것이다. 예수는 분명 그곳을 향했고, 향하고 있으며, 향해 나갈 것이 분명하기에.… ‘돈과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자들, 기꺼이 그렇게 하시라, 나는 예수 그를 만나러 갈 테니’ 라고 배짱 한번 부려 보는 주일이고 싶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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