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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종양과도 같은 시대의 아픔 앞에"나를 만지지 마라", 호세 리살, 눌민, 2015.
구영주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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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09  10: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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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지지 마라.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이 책은 필리핀의 민족주의 혁명가 호세 리살의 장편소설이다. 소설가, 시인, 저널리스트, 안과 의사 같은 수많은 이름의 직분을 가진 작가는 자신의 조국인 필리핀이 스페인의 식민통치 아래서 겪고 있는 민중들의 뼈아픈 고통에 주체의식과 자존감을 일깨워 준 대표적인 의식혁명가였다. 당시 필리핀은 정치적으로는 스페인의 속국으로서 또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의 속국으로서 이중적 고통에 놓여 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제들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이익과 교계의 권위와 명예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불사하는 부패한 정치세력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필리핀인들은 그런 교회와 사제들에 대해 어떠한 문제제기도 없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주종의 관계 속에 종과 노예로 전락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 필리핀인들에게 하느님이란 ‘정작 모든 일들은 신하들이 처리하고 백성들은 오히려 신하들을 더 무서워하는 나라의 힘없는 왕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가 타시오라는 노인을 통해 연옥의 역사를 말해 주는 대목은 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작가 자신의 생각이 읽혀진다. 이는 단순히 민족의 독립은 정치뿐 아니라 종교에서부터도 진정한 해방과 독립을 맞이해야 함을 말한다.

산디에고는 오늘날의 로마, 즉 19세기의 로마와 닮아 있고 교구신부는 바티칸의 교황이며 스페인의 식민 통치 세력은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비유된다. 그리고 그런 백성들의 현실 앞에 하느님은 ‘그저 그런 힘없는 왕’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종교가 얼마나 오랜 세월 하느님 뜻과는 다른 수많은 왜곡과 인간들을 박해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왔는지 일면을 잘 묘사해 준다.

   
▲ "나를 만지지 마라 1,2", 호세 리살, (김동엽), 눌민, 2015.

“하느님이여! 당신이 그처럼 잔인하지 않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오직 지극히 선한 이로 부를 뿐입니다”

이 대목은 소설 속 표현대로 ‘늙고 바보스런 학자’ 타시오를 통해 리살 자신의 종교관과 하느님상을 잘 드러내 보여 주는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소설은 중반부로 갈수록 필리핀 민족의 불행한 역사 속에서 왜곡된 하느님과 억압된 삶의 일면을 아프게 드러내 준다. 어린 소년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도둑으로 몰아 매질을 하며 밤낮없이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잠을 줄이고 먹는 것을 줄여서라도 돈을 뜯어내 면죄부를 사게 하는 교회의 모습은 정말이지 참혹하기까지 하다. 출처도 없는 비싼 구원의 비용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소설은 가난한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절망에 이른 민중의 탄식소리로 가득하다. 민중은 그저 스페인 교구와 사제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바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은 학교에서 엄격한 가톨릭 신부들에게 외우기도 벅찬 기도문을 외우길 강요당하며 매질과 혹독한 벌을 받으며 학대당한다. 가난한 민중의 자식들은 그런 배움의 기회마저도 없다.

소설이 후반으로 치달을 수록 필자는 더욱더 마음이 아파 왔다.
병자나 앓고 있는 이에게는 더 많은 죄의식과 자기부정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설교하고 그때마다 마치 목숨을 담보로 위력을 행사하는 신의 모습을 보여 준다. 많은 돈을 헌납하고 모셔 놓은 성상에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기복적 기도로 자기 위안을 삼는 신자들의 모습은 사실상 오늘날 우리들의 일부 잘못된 신앙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베라와 민중의 영웅같은 인물 엘리아스의 대화는 리살의 정치적 신념을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폭력을 진압하기 위해 더 강력한 군부대를 동원시키고 모든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진압해야 한다는 정부의 의식에 리살은 엘리아스라는 인물을 내세워 비폭력과 평화적 방법만이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음을 말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을 살피지 않고 증상만을 약화시키기 위해 강력한 힘의 논리를 쓰는 것은 결국 병의 근본적 치유가 아니라 일시적 억눌림만 가중시킴을 얘기한다.

그 결과 15년째 도시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나 범죄가 줄기는커녕 도둑과 강도는 그전보다 더 활개를 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군인들은 평화로운 주민들의 집에 들어가 사람을 때리고 단순히 신분증을 챙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하고 고문한다. 군인들의 관습과 폭력은 하급군인들에게 잘못 전달되어 농민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다양한 구실이 되어 주었다. 군인들이 조장하는 공포가 범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꼴이 되었다. 리살은 이러한 정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을 엘리아스라는 인물을 통해 폭로하며 정치적, 종교적 개혁을 간절히 염원했다. 리살의 외적 조건과 환경은 주인공 이베라와 비슷했으나 내면에 꿈틀대는 의지는 엘리아스를 닮아 있다. 리살은 이 둘을 내세워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표명했던 것이다. 리살은 엘리아스를 통해 크게 정치적 개혁과 종교적 개혁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한다. 자기 조상들의 비참하고 통탄할 역사를 안고 있는 엘리아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왜 숲에 숨어들어 사는 민중의 대변인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잘 보여 준다.

   
▲ 호세 리살.(1861-96) (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비참한 필리핀 민중의 역사는 소설을 읽는 내내 필자의 마음을 일렁이게 했고 진정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우리 역시 일본의 식민통치를 겪은 민족으로서 우리 민족의 아픔 또한 다르지 않다. 무지하고 고집스럽고 부도덕하며 정직하지도 않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그 많은 권력은 미친 사람에게 무기를 쥐어 주고 민중을 제멋대로 다루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엘리아스의 말은 지금의 우리 현 상황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정부는 정말 신중하고 고결하게 자신의 오른팔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그렇게 많은 힘과 권한을 줘야 할지 신중해야 한다. 착취와 핍박과 민중의 피로 얼룩진 필리핀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 깨어 인간의 자존과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아파하며 민중과 지도자들을 흔들어 깨우고 싶어 했던 리살의 아름다운 염원이 이 두 권의 소설에 모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결국 주인공 이베라는 모함을 받고 조국에게 배신당하며 비참하게 죽어간다. 이는 리살의 죽음과도 맞닿아 있다. 스페인 당국은 이 소설을 금서로 지정했으며 리살은 반란, 선동, 음모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고 1896년 12월 30일 처형당한다. 소설 발표 이후 필리핀의 독립 운동은 더욱 거세져 1898년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세웠으며, 1946년엔 아시아 최초로 서구로부터 독립을 성취한 최초의 국가가 된다. 또한 리살은 스페인 식민 정부와 신부들에 대항하여 개혁을 주장한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된다.

제목인 “나를 만지지 마라"는 요한 복음 20장 17절의 구절로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한 말이다. 리살은 이 소설의 헌사에서 식민 지배하에 필리핀 민중이 겪고 있는 만질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종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양의 전설에 의하면 종양은 만지면 옮거나 악화되기 때문에 감히 손을 댈 수 없는 것인데, 리살은 자신의 조국을 이러한 종양에 빗대며 이것을 과감히 드러내고 만짐으로써 조국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했다. 이 소설은 단순히 필리핀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의 민족주의를 일으킨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소설이다. 안과 의사이기도 했던 리살은 눈꺼풀에 생기는 암을 일러 "Noli Me Tangere"(나를 만지지 마라)라고 부르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 민족의 비참함을 눈꺼풀에 생기는 암으로 비유하며 그 병명을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건 자신의 조국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아픈 조국을 치유하고자 했던 그의 간절한 염원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국가 중 조금 늦게 번역된 감이 있지만 지금처럼 시국이 혼란한 시점에 이 책을 만나고 이렇게 소개하게 된 것은 정치적으로도 크나큰 의미와 축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참을 여운 속에 머물렀다. 우리는 지금 시대의 민주주의와 인간 자존의 회복을 위해 매주 광장에서 촛불을 든다. 그 촛불은 종양과도 같이 아픈 지금의 우리나라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리라 믿는다. 힘의 논리가 아닌 비폭력과 평화의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늘 아픈 종양 같은 우리를 그분의 빛과 사랑으로 드러내 주시듯이 말이다.

   
 
구영주
(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다수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7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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