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1월 13일(연중 제33주일) 루카 21,5-19

종말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 끝날의 징표는 대개 무서운 전쟁이나 환난, 그리고 우주론적 혼돈으로 적시되고 믿어진다.(마태 24; 마르13) 전쟁과 반란, 땅에서의 무서운 징표, 그리고 하늘의 징표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유대 사회를 관통했던 묵시 문학의 전형적 표현들이다.(이사 13,10.13; 34,4; 에제14,21; 32,7-8; 아모 8,9; 4에즈 13.30 이하) 그렇다고 비현실적 상상의 세계만을 그린 게 종말의 묘사가 아니다. 6절에 나타난 성전의 파괴는 66-70년, 티투스 치하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몰락 사건을 암시한다. 8절에 사용된 '플라나오'(πλανάω), 곧 속는 일을 가리키는 이 동사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이단이나 거짓 예언자들의 활동을 가리킬 때 사용된 동사다.(2요한 7; 묵시 2,20) 이를테면, 종말의 이야기는 역사 현장의 비참한 사건이나 사회적 갈등을 1세기를 살아간 공동체의 신앙 안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재해석은 종말의 의미를 새롭게 가져온다. 흔히 대립이나 갈등의 구도로 종말을 이해한다. 예컨대, ‘지금’이 아닌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시간적 대립을 생각하기도 하고, 평범한 ‘지금’의 상황과 다른 무언가 특별하고 굉장한 신호처럼 여겨질 상상 밖의 세상을 기다리는 공간적 대립을 전제하면서 종말의 이야기를 해석할 수도 있다. 오늘 복음 안에서도 대립은 강력히 드러난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심지어 가족 간의 대립까지 명징하다. 대립의 끝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단절의 상황까지 치달을 것이다.

대립의 구도는 일정 부분 ‘무관심’으로 시작하여 ‘무관심’으로 끝맺을 수 있다. 서로의 적대감으로 각자의 진영 논리에 빠져 결코 상대방의 사상과 문화, 그리고 비전을 공유하지 않겠다는 의지적 무관심은 물론이거니와 한 번도 상대를 생각하지도 않은 채 저만의 삶을 살아간 이들의 잠재적 무관심이 대립의 구도에 명확히 드러난다. 청와대에 계신 분이 광화문의 차도에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논리가 대립의 구도가 가지는 함정이다.

종말은 증언의 기회다. 박해와 혼란, 그리고 대립의 구도 속에 과감히 들어가 그 삶이 ‘당신 때문’이라는 역설적 긍정이 종말을 읽어 내는 키워드다. 죽어도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말하는 건, 박해 속에 장렬히 희생당한 영웅의 대속 개념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죽은 것이 다친 것이 아닐 수 있는 건, 죽음이 곧 생명이라는 복음의 역설적 논리 때문이다. 슬픔 그 자체가 기쁨이 되고 가난 그 자체가 부유함이 되고 불행 그 자체가 행복이 되는 것, 그래서 죽으면 죽을수록 삶이 되고 살아 있는 증거가 되는 것, 그게 복음의 논리고 종말의 논리다.

▲ 인내할 자리, 생명의 자리는 지금 갈등의 한복판, 광화문이다. (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슬프고 가난하고 불행한 자리에서 증언을 할 시대가 종말의 시대다. 증언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 데 소용되는 게 아니다. 증언은 지금 사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다잡는 것이다. 대립의 구도 속에 서로에게 삿대질하는 것으로 적당히 자신의 몫을 챙겨 두려는 삶은 슬프지도, 가난하지도, 불행하지도, 그렇다고 기쁘지도 부유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그저 ‘무관심’이라는 속내를 덮어 두는 비겁함 내지 적당한 기회를 잡으려는 협잡꾼의 술수일 뿐이다. 종말론적 증언은 지금의 삶이 어떻든, 그 속에 포탄처럼 던져져 불꽃처럼 산화할 수 있는, 그래서 그것이 진정한 제 삶의 이유이자 근본이라 스스로 고백하는 ‘자백의 행위’다.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의 함성은 대립의 극을 보여 줬다. 박근혜와 반 박근혜 구도 속에 100만의 목소리는 저항의 목소리였다. 다만 그 목소리가 비전을 담아 냈을까 하는 문제는 조용히 다시 짚어봐야 한다. 행여, 평화적 시위였다, 박근혜에 대해 속 시원히 퍼부었다, 우리 소시민의 분노를 정확히 보여줬다 정도로 토요일의 함성을 규정짓는다면, 또 다시 우리는 새로운 박근혜, 새로운 최순실을 불dj올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중에 가장 지지율이 높다는 한 대권 후보는 여전히 ‘주저한다’! 대립의 구도 속에 계산하며 이쪽도, 저쪽도 담아 내지 못한 채 습관이 된 ‘무관심’을 ‘참여 정신’이라고 강변한다. 옳고 그름에는 대립이 필요없다. ‘신중함’이라는 변명으로 옳고 그름의 딱 중간에서 저울질하는 건 여전히 종말을 살지 않는, 그래서 여전히 대립을 즐기며 제 삶의 잇속만 챙기는 정치 모리배의 논리다. 저항은 솔직함 속에 자기 반성을, 투명함 속에 나아갈 삶의 비전을 이야기하는 참으로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전쟁이다. 종말의 전쟁은, 그 전쟁에 몸으로 뛰어들 사람들이 일구어 내는 생명의 길이어야 한다. 우린 인내로써 생명을 찾을 것이다! 인내할 자리, 생명의 자리는 지금 갈등의 한복판, 광화문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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