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0월 2일(연중 제27주일) 루카 17,5-10

복음서들은 유대인들의 문화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해서 남긴 초기 신앙인들 대부분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는 유대인 고유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예수님에게 청합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시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던져져라' 하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1,23)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고유한 과장법이 있습니다. “좋아 죽겠다”, “바빠 죽겠다”같은 표현들입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과장법입니다. 그것을 외국어로 옮기면 뜻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은 사람도 없고, 산을 바다에 던진 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는다는 말이나, 산을 바다에 던진다는 표현은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전달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어떤 신통력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초능력의 소유자가 되고 싶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뒤, 마귀가 그분을 유혹하였다고 말하면서 유혹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는 초능력,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무사한 초능력, 부귀영화를 사람들에게 주는 초능력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면서 하느님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 따라 살아야 하고,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하며,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것은 기적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삶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놀라움은 하느님나라의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 자기 위주로 살던 삶을 버리고, 하느님 위주로 살게 되는 놀라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위주로 삽니다. 재물과 지위를 탐하고, 여러 가지 노력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합니다. 그러던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하느님의 일, 곧 베풀고, 사랑하며 용서하는 일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믿음은 그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녀는 부모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부모의 뜻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함께 계시는 부모를 무시하고, 자기 위주로 살면, 우리는 그것을 불효 혹은 패륜이라고 말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도 자기 위주로 살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기 위주로 살면, 자녀들은 제대로 자라지도, 성숙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사랑은 인간이 자기 한 사람 위주로 살지 않고 헌신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자기만을 위하고 살아서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 그런 헌신은 놀라운 일로 보입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사랑, 부모를 위한 자녀의 사랑은 인간 모두가 하는 일이라, 우리 눈에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하느님이 인류와 함께 계신 사실을 우리가 확인해 볼 수 있는 가장 기초적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여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오시게” 하자고 가르쳤습니다. 신앙은 초능력을 얻어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 아닙니다.

▲ 겨자씨.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예수님은 가난한 이, 병든 이, 죄인, 여러 가지 이유로 소외당한 이들과 어울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사람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는 가난한 이와 병든 이 그리고 모든 불행한 이는 하느님이 버린 죄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마귀 들렸다고 말하던 정신질환자나 간질환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라,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 한 사람 잘되고, 행복할 것을 비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은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만큼 엉뚱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한 사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보라는 말씀은 의미 없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은 그런 불가능한 일이 사람들 안에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는 사랑과 봉사와 헌신의 역사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 12,24) 역사입니다. 초인적 능력을 탐하고, 자기 한 사람 잘 될 것만 찾던 사람들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깨닫고,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자기 주변에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잠시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 자신만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힘까지 빌려서 자기 한 사람 잘되는 길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에 대해 깨닫게 해서 그런 망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새롭게 태어나듯이,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종이 주인에게 봉사하듯이, 봉사한 뒤에,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물러날 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교가 가르치던 것과는 반대되는 말씀입니다. 유대교는 자기 할 바를 다 했으면, 당연히 상응하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땅에 떨어진 밀알과 같이 죽었습니다. 쓸모없는 종과 같이 세상에서 물러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돋보이게 하는 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사랑하고 섬기며, 그것을 위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배웁니다. 우리가 배워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라, 우리 스스로는 쓸모없는 종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자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여 표류하던 생명이 하느님이라는 넓은 바다 안에 심어지는 놀라운 일입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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