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9월 18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루카 9,23-26; 로마 8,31-39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인은 현재의 목숨을 최대의 가치로 생각하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자기 삶의 최대 보람을 하느님 안에 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현세적 목숨마저 버릴 수 있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북경에서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한 것이 1784년입니다. 그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 박해는 1882년 조선 조정이 미국과 수호 조약을 맺기까지 약 백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참수 혹은 옥사로 순교한 분들의 수가 만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분들은 온갖 잔인한 형벌을 받고,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가족들은 관비(官婢)라는 종의 신분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외국에서 선교사가 파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신앙을 영입하였다는 사실은 가톨릭 교회 선교의 역사에 예외적인 경우로 기억됩니다. 신앙이 한국 땅에 들어와서 뿌리도 채 내리기 전에 박해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신앙인이 된 분들은 교리 교육도 충분하게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만 명이 훨씬 넘는 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 조선 사회 양반들.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천주교 관계 한문 서적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문으로 된 몇 권의 서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였습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기 약 150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서학이라 불렀습니다. 그 시대 그 문서들을 영입하여 연구한 사람들은 실학파라 불리던 유교 학자들이었습니다. 유교 국가를 표방하는 조선의 지성인들은 성리학의 공리공론에 빠져 있었습니다. 실학파 학자들은 합리적이며 현실성 있는 학문과 사회 제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시련을 겪은 직후의 일입니다. 그 무렵 실학파가 연구한 천주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새로운 세계관, 사회관이기도 하였습니다.

“홍길동”이라는 소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소설의 저자 허균도 이 실학파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허균에 대한 연구서를 쓴 어떤 학자는 그 시대 조선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첫째, 무고로 죄 없는 사람들을 고발하여 감옥에 가게 하는 일이 많아서 백성은 불안하고 서로 믿지 못하는 풍조가 휩쓸었다. 둘째, 벼슬 팔아먹기와 뇌물과 횡령이 판쳤다. 셋째, 과거 시험 문제가 사전에 유출되는 등 부정이 행해지고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는 당연한 것으로 되었다. 넷째, 무리한 토목 공사들을 벌려 놓고 관리들은 공사 자재를 횡령하고, 민생고에 허덕이는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아서 매우 사치스럽게 살았다. 결국 임금으로부터 지방 수령에 이르기까지 자기 신분을 보호하기 바빴고, 그것을 위해서는 금력이 필요했다. 임금은 신하들로부터, 신하들은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는 길밖에 없었다.”(“허균”, 이이화, 한길사, 1997. 45-47) 그 책의 저자가 소개하는 그 시대의 사회상입니다.

그런 사회적 여건에서 서학을 공부한 실학파 학자들에게나 후에 신앙을 영접한 초기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은 대단히 신선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여 주었습니다. 군주가 절대적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법은 조정이 만들어 임금의 이름으로 반포하면, 백성은 그것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느님이 질서 지어 만드신 자연과 마음의 법, 곧 자연법과 양심법을 가르쳤습니다. 노예와 같이 법을 지키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의 법을 존중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0,1)을 열어 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법은 당시에 자행되던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고 사랑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었습니다. 무자비한 법과 제도에 한마디 항의도 못하며, 짓눌려 살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시대 사회가 안고 있던 모든 부조리를 한순간에 걷어 내는 기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출생지인 솔뫼 성지에 있는 아레나 광장의 벽화. ⓒ왕기리 기자

조상 제사의 거부라는 죄목은 그리스도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찾아낸 명분이었습니다. 조상 제사는 그 시대 유교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신앙인들이 그것을 거부한 것은 유교 국가의 근본 질서를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권력 구조의 절대성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이 축첩을 거부한 것은 유교가 가르친, 남녀 차별의 철칙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은 그 시대의 계급 차별도 거부하였습니다. 사람은 모두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자녀라는 의식은 그 시대의 사회 계급적 차별을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순교자들의 심정을 엿보게 하는 고백 하나가 있습니다. 순교자들 중 백정 출신인 황일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천당이 둘 있다. 하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고 또 하나는 양반과 쌍것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똑같이 존중하는 이 세상의 천당이다.” 백정 출신으로 멸시당하며 살던 사람이 신앙인이 되어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 느낀 것이었습니다. 계급의 장벽 없이, 모두가 형제자매로 통하는 신앙 공동체는 그에게 천당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그들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질서를 열망하였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이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우리의 순교자들은 그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버리지 못하여 모진 형벌을 감수하고 생명을 잃으면서도 그 사랑을 열망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을 향해 떠났습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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