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 교수 인터뷰

“정의의 문제는 저쪽에 있는 커다란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 일상에서 적용되고, 실천되고 비판돼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정의의 문제에서 정치적 사안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강남순 교수는 얼마 전에 나온 책 “정의를 위하여”에 “구체적 정황과 연결돼야 진정한 정의가 가능하다”는 방향성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 브라이트 신학대학원에서 철학적, 신학적 담론을 가르치는 신학자다.

책은 정치적 저항, 사회적 저항, 종교적 저항 그리고 윤리적 저항이란 네 부분으로 나눠져 일상 속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왜’라는 물음표를 붙임으로써 저항하고, 이것이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그의 비판적 성찰을 담은 44편의 글로 이뤄져 있다.

그중 '종교적 저항' 부분에서 강 교수는 “예수의 가르침이 종교라는 제도로 정형화됐을 때 예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억압적 구조를 낳는다”고 지적하며 이런 정형화된 종교에 저항하길 요청한다.

방학동안 한국에 온 강남순 교수를 만났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교회의 가르침(예를 들어 미사 중에 미사보를 쓰는 것)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평신도가 스스로 변혁의 주체가 되라는 그의 메시지는 점점 보수화되고 자본주의화 되어가는 교회가 쇄신하길 바라는 이들에게 힘을 준다. 더불어 그는 정의구현사제단에게도 당부의 말을 전했다.

▲ "정의를 위하여", 강남순, 도서출판 동녘, 2016. (표지 제공 = 도서출판 동녁)
-“정의를 위하여”에서 말한 “정형화된 종교적 공식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달라.

예수를 따르는 것과 특정한 종교에 속한 종교인이 되는 것이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의 핵심은 아주 단순히 말하면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게 하나의 축이고 다른 축은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교회와 그 가르침이다. 이 두 축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그 거리를 어떻게 좁혀갈 것인가가 과제다.

예를 들어 죄의 개념을 살펴보면, 가톨릭에서 죄라고 규정한 것은 하느님이 내려준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죄인지에 대한 교회의 규정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 왔다. 구체적으로 인공 유산은 가톨릭에서는 죄이지만 개신교에서는 교단마다 다르다. 또 롯이 손님 대신 자기 딸을 내놓은 것은 여자를 소유물로 여기던 당시에는 죄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죄가 된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규정된 죄와 시대를 초월한 죄의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 시대를 초월하는 즉 변하지 않는 죄는 타자를 증오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정형화된 종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고,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굳어진 것은 무엇인지 성찰하라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굳어진 것들은 신앙생활의 깊이나 책임의 문제를 외면하게 한다.

-말한 대로 예수를 따르는 것과 정형화된 종교가 가르치는 것들 사이에 구분은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하고 싶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학교에 가란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 사회에서 배고픈 자는 누구인지에 대해 공부하고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배고픈 자'란 실제적 배고픔만이 아니라 은유적 표현이므로 그 의미를 구체적 정황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형화된 종교적 틀 안에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틀은 평등을 점점 넓히는 방식으로 계속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정형화된 종교에 대해 2가지 과제가 있다. 하나는 내가 속한 종교 전통에서 무엇을 보존할 것인지에 대한 책임이 있고, 다른 하나는 종교 전통에서 무엇을 버리고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가다.

-이 시대에 가장 배고픈 이들에 대한 책임이 보존돼야 할 것들인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 연민, 환대, 연대, 사랑 즉 지금 우리가 연대할 사람은 누구이고, 누가 외면당하는지 질문하는 것이 보존해야 할 것이다. 각 종교마다 버려야 하는 것이 있다. 개신교에서 감리교나 장로교는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다는 전통을 과감히 끊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다. 그것이 보다 평등을 확산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전통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평등과 정의를 확장하는 차원에서 풀어 갈 것은 여성서품 문제다. 여성 서품은 단지 서품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여성이 온전한 인간이라고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또 인공 유산을 포함한 여성의 자율적 선택권의 문제가 있다. 인공 유산은 딜레마 상황에서 불가피한 결정이다. 이때 선택의 권한을 여성에게 주는 것이 여성평등이며 여성을 온전한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성소수자에 관한 것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판단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답이 중요하다. 우리의 과제는 ‘누군가를 죄다, 죄가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 강남순 교수. (사진 제공 = 강남순)
-얼마 전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이 축일로 높여졌고, 이를 여성사제 서품에 조금 다가갔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해 착한 여자(성녀) 아니면 악한 여자(악녀) 이 두 가지 이미지만 있는데, 착한 여자의 대명사가 ‘마리아’이고 악한 여자의 대명사는 남자를 타락시킨 ‘이브’다. 중간은 없다.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이미지(마리아 어머니처럼 고귀한 여성)는 고정돼 있고 이 기대에서 벗어나면 나쁘고 타락한 여성이 된다.

그래서 마리아를 추켜세우는 것은 여성을 더욱 더 가부장제적 이미지에 가두는 반작용이 된다. 마리아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야 한다. '마리아 찬가'(마니피캇)를 보면 마리아는 해방자이자 혁명가다. 세상의 구조를 확 뒤집는 마리아의 모습을 부각하면서 추앙한다면 여성의 지도력과도 연결할 수 있다.

무비판적이고 권위에 순종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이미지의 마리아로 반복된다면 여성을 오히려 얽매는 굴레가 될 것이다. 그런 고정관념 속의 이미지에 맞지 못하면 늘 나쁜 여자가 되기 때문이다. 여성을 다양한 모습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억압이다.

-얼마 전에 성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보수단체에게 ‘위험한 교수’라고 불렸다. 사회와 교회가 점점 보수화되면서,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에 회의가 들기도 하는데....

현실세계는 평면이 아니다. 큰 그림도 봐야 하지만 무수히 많은 작은 그림도 봐야 한다. 교회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뒤로 가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작은 귀퉁이에서는 변화가 있다. 이것을 같이 봐야 한다.

개신교에서 복음을 자본주의화하고, 헌금 많은 교회가 마치 복음 잘 실천하는 것처럼 여기는 걸 보면 절망적이지만, 한편에서는 작은 교회에서 눈에 띄지 않지만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사는 목회자와 평신도도 있다. 한국에 있을 때 수도회에서 강연을 자주 했는데, 수도회가 그렇게 다양한 일을 하는지 몰랐다. 수도회처럼 작은 귀퉁이에서 사회의 변화를 일궈 내는 분들이 있다.

변하지 않는 교회를 보며 절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언자적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할 수도 있다.

-교회에 바라는 점?

아래로부터의 혁명, 바티칸이나 사제가 변하지 않는다고 탓하지만 말고, 평신도가 변혁의 주체가 돼서 변화를 일으키면 좋겠다.

예를 들어 독서모임을 만들어서 새로운 마리아를 공부하든지, 현대 사회에서 정의를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는 등 바티칸에서 가르침이 내려오거나 강론에서 알려 주길 기다리지 말고 평신도 스스로가 변혁의 공간을 만들어 내길 바란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개신교에 없는 희망적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정의의 개념을 확산시키고 복합화하는 것이다. 앞으로 사제단이 좀 더 의미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나 정치 관련 이슈뿐 아니라 젠더, 인종, 계층, 섹슈얼리티, 장애, 생태 문제 등도 다루면 좋겠다. 이렇게 정의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강남순 교수는 현재 한국에서 강연과 설교 일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연말쯤에는 “용서”를 주제로 한 책이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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