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7월 3일(연중 제14주일) 루카 10,1-9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는 사실은 마태오, 마르코 및 루카복음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들은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루카복음서에만 있습니다. 루카복음서는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파견하셨다(9,1-6)고 말한 다음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시고....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9,51-52)고 말합니다. 이 복음서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예수님이 앞장서서 예루살렘의 십자가를 향하여 먼 길을 가면서 여러 가지를 가르치신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루카복음서 저자는 초기교회의 발전이 열두 사도의 수고만으로 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이 별도로 일흔두 사람을 더 파견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 외에 일흔두 제자도 파견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십자가를 통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서를 집필한 사람이 복음서의 후편으로 사도행전을 집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떠나신 뒤, 그분이 파견한 제자들이 활동하여 그리스도 신앙이 예루살렘에서 온 세상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알립니다.

루카복음서는 일흔두 제자의 파견 이야기를 하면서, 열두 사도를 파견할 때, 예수님이 하셨다는 말씀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도 말 것이며, 병든 이들을 고쳐 주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거든, 그 지역을 떠나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파견과 관련된 이런 말씀들은 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초기 신앙인들이 이미 실천했던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은 그 시대 상류층 사람이나 귀족이 여행하듯이, 많은 짐을 가지고 호사스럽게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락한 생활보다 복음 선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것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는 말씀은 대우가 더 나은 집을 찾아다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70 사도들 이콘.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 시대 그 지역 사람들의 예의범절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 중동 사람들은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온갖 안부를 묻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한동안 지체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니는 사람은 그런 통속적 관례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의범절보다 선포할 복음이 우선한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우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환자에게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람은 귀에 라디오 이어폰 꽂고, 목에 무선 전화기 걸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면서 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오로지 복음 말씀만을 소중히 모시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복음 선포라는 말입니다. 기원후 85년경, 루카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기원후 66년에 유대인들 중 과격파가 로마정권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역사가 유대전쟁이라 일컫는 독립전쟁이었습니다. 로마에서 팔레스타인까지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전세는 유대인들에게 유리하였습니다. 그러자 과격파가 아닌 유대인들도 그 전쟁에 대거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그 전쟁을 외면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이 파견한 병력이 도착하자 전세는 역전되어, 유대인들의 참혹한 패배로 전쟁은 끝났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그야말로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기원후 70년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민족을 배반한 자라고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것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이라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기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그런 해석은 유대인들을 더욱 자극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민족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 한편 로마제국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로마황제를 숭배하라고 강요하였고, 그것에 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역사적 악조건에서 오늘 복음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위험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 로마군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는 모습.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선교는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나라의 선포는 그들이 말로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에게 병은 육체적 고통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종교적 절망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불행이 닥치면, 하느님이 벌하셨다고 쉽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을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하느님은 자비하신 아버지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하였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불행을 당한 사람이 그것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착각하며 절망하는 데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도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친 것은 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고, 벌을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살리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은혜로운 분이라고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열두 사도의 파견과 별도로 일흔두 제자의 파견을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신앙인들의 노력으로 이룩한 교회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의 자유로운 참여와 기여가 있어, 발생하고 유지되는 유연한 조직체입니다. 유럽이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교회는 성직자 위주의 경직된 조직체가 되었습니다. 극소수의 배운 사람이 대부분의 무식한 사람을 선도해야 했던 유럽 중세 사회였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교계제도에 몸담은 사람들은 교회의 모든 일을 결정하였습니다. 신분 따라 복장도 달리하던 시대였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직도 유럽 중세의 그런 유령들이 살아있습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신분을 탐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다스리고 억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아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섬김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몸가짐입니다. 경직된 과거의 유산을 털어 버리고 섬김을 실천하는 유연한 교회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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