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6월 12일(연중 제11주일) 루카 7,36-50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가 생겨 났습니다. 그 이야기들 안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비유 이야기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 이야기, 길에서 강도를 만나 다 죽게 된 행인을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 등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면서 사용하신 비유이야기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들어 남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신앙공동체가 그분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일을 회상하면서 발생시킨 이야기들입니다. 사람이 죽어 없어지면, 그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그분에 대해 회상하면서 발생시킨 이야기들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은 이야기,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한 이야기,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을 가라앉힌 이야기, 유대인들로부터 버림받고 로마 총독에게 고발되고 단죄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야기 등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런 이야기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으며 그분이 하느님에 대해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사셨는지를 말해 줍니다. 복음서들은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도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일어난 일 한 가지를 제자들이 이야기로 만들어 알리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아 그 집 식탁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 고을에 죄인으로 알려진 여인 한 사람이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집주인은 속으로 말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예언자는 하느님의 일을 알고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예언자라면, 그 여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 그 여인을 기피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는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과는 접촉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집주인 시몬은 바리사이로서 그 여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집주인 시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을 각각 빚진 두 사람을 예화로 들면서 "이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이고, 그 용서에 보답하는 길은 용서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하신 말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붓다', 작가 미상, 1503.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이 이야기에서 시몬이라는 바리사이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은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과 다릅니다. 유대교의 하느님은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버립니다. 그 하느님은 율법을 사이에 두고 인간과 대결관계 안에 있습니다. 단죄하며, 버리고 벌을 주는 관계입니다. 인간은 그 하느님 앞에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제물을 정성들여 바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분입니다. 율법이 명하는 대로 지키고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인간은 항상 긴장하고 노심초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으셨던 하느님은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그 죄 많다는 여인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성찰하고 죄를 뉘우쳤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물론 보속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죄를 용서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믿음, 그 자체가 벌써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소중히 생각하는 원리는 인과응보입니다. 잘한 만큼 보상을 받고, 잘못한 만큼 벌을 받는 원리입니다. 그것은 인류역사 안에 제일 먼저 나타난 함무라비 법전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표현한 원리입니다. 그것은 오늘도 인간 사회의 형법과 민법의 기본 원리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가 지향하는 질서의 기본을 이루는 원리입니다. 유대교는 하느님도 그 원리를 기본 질서로 행동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상을 받고, 잘못 지키면 벌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제물 봉헌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은 같은 원리를 바탕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 제물을 바치지 못하는 사람을 모두 죄인으로 매도하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신다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등장한 여인도 하느님이 버린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믿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과 대결관계 안에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베풂이 있어 자녀의 생명이 시작하였고, 아버지의 보살핌이 있어 자녀가 사람이 됩니다. 옛날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어머니의 역할도 당연히 들어 있었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베풀어서 있는 생명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살핌이 있어 살아 있으며,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배워서 사람 노릇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 주고, 장애인을 치유하여 그들이 충만한 생명을 자유롭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 같이, 우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을 배우는 그리스도인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합니다. 그 실천이 있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그런 실천들이 있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것을 믿고 실천하여 하느님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실현되도록 노력합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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