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가톨릭 매체 EWTN의 문제

(레이먼드 슈로트)

내가 1957년에 예수회 수련자였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요한 23세 교황이 방금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했다고 우리 수련장이 발표했던 때다. 하지만 공의회의 영향을 내가 실제로 느끼기 시작한 것은 우드스톡 신학대에서 거의 10년이나 신학공부를 한 뒤였다.

어느 날 사제품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한 학생이 한 작은 전례를 집전하다가 성체를 내 손에 놓아 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회중이라는 그리스도의 몸과 내 손바닥 안에 함께 현존하고 있다고 이해하게 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1967년에 세계 각지의 본당 제대들은 방향을 바꿔 신자석을 향하게 배치되었으며, 신자들은 성체가 축성되는 동안 미사 집전자 뒤에서 고개를 빼들고 성체를 보려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은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와 신자석에 앉은 회중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가운데 사제가 성체를 높이 들어 올린다. 내 모본당의 제대는 1967년 당시에 여전히 방향이 바뀌지 않은 상태였지만, 내가 첫미사를 드릴 때 어머니께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른 새 전례방식을 환영하는 뜻으로 새 나무 제대를 사 주셨다.

그로부터 27년 뒤인 1994년에, 나는 조지타운 대학에서 내가 쓴 언론인 에릭 세버레이드의 전기를 연구하던 중 <NCR>에 글을 쓰느라 2주를 통째로 썼다. 그때 나는 <EWTN>(영원한 세상 텔레비전)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EWTN>은 얼마 전 죽은 메리 안젤리카 수녀가 1981년에 만들었다. <EWTN>이 세계 최대의 가톨릭 텔레비전 방송이었기 때문에,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지만, 그녀 자체도 “뉴스”거리였고, 그녀는 교회의 얼굴로 인식되었다.

나는 그때 쓴 기고문에서 안젤리카 수녀는 가톨릭 수녀가 재미있는 존재이길 바랐던 당시 미국 문화의 산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 얼굴 아래에는 분노가 펄펄 끓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는데, 물론 그들 잘못은 아니지만, 그 대중은 (안젤리카 수녀가 만든 매체들에 의해) 종교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받고 있었고, 기적들과 (성모 등의) 발현에 관한 이야기들, 부실한 신학, 사회 문제에 대한 무시, 그리고 성경에 대한 학문적 성과를 무시하고 말 그대로 “역사”로 받아들이는 성경 이해 등이 전달된 주요 내용이었다. 보기를 들자면, “이 자리가 여호수아의 군대가 건너 와 (함성을 지르자) 성벽이 무너진 그곳이다.”라는 식이다. 나는 이것이 미국 교회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는지 궁금했다.

안젤리카 수녀는 3월 27일에 92살로 죽었고 4월 1일에 <EWTN>이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EWTN>의 영성의 중심물이던 하느님 자비의 예식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행사를 한 뒤에 장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묻혔다.

그 주 내내, 생전 그녀의 가장 좋았던 그리고 가장 나빴던 모습들의 일부가 화면을 가득 채웠으며, 여기에 빌 도너휴, 리처드 뉴하우스, 조지 러틀러 신부 같은 보수적 가톨릭인들의 증언들이 더해졌다. 빌 도너휴는 안젤리카 수녀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리처드 뉴하우스는 안젤리카 수녀가 “현 순간의 성사성을 구현했다”고 말했다. 러틀러 신부는 그녀가 “어머니”였다고 했고, 지금 유행하는 단어인 “죽음(passing)”은 죽음의 현실성을 부인하는 것 같다며 피했다. 마치 안젤리카 수녀는 돌아가신(pass) 적이 없는 것처럼, 그녀가 한 멕시코 밴드의 연주에 맞춰 머리에 쓴 엄청 큰 솜브레로 모자(챙이 넓은 멕시코식 모자)를 들썩이며 격렬하게 춤을 추는 영상들이 방영되었고, 그녀가 교계제도와 크게 부딪혔던 두 불명예스런 사건의 장면들도 방영되었다.

방영된 다른 장면들은 그녀의 진정한 재주들이 무엇이었는지 보여 줬다. 그녀는 한 작은 스튜디오에서 청중들 앞에서 생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무릎 위에는 성경 한 권이 놓여 있었고 그녀는 한 구절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시청자의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를 한 여성은 "남동생이 정신병이 있고 집 밖 출입을 못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상황을 감당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젤리카 수녀원장은 십자가는 언제나 지기 힘들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십자가를 떼 내어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그 장면보다 전에 찍혔던 다른 한 화면에서는, 젊은 시절의 안젤리카 수녀원장이 단독 코미디언 연기를 한다. 청중들이 배를 움켜쥐고 웃는 가운데 그녀는 90살인 아브라함으로 분장하고 천사에게서 자기와 아내 사라가 남자 아이를 얻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 이 장면이 우스운 것은 (성화에 나오는 것처럼 거룩한 모습이 아니라) 천사의 말을 듣는 그 아브라함이 노약한 모습으로 그저 고개만 까닥까닥하는데, 마치 졸음이 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물론, 아이러니한 것은 안젤리카 수녀원장이 어린 시절부터 2001년에 겪은 뇌졸중에 이르기까지 긴 생애 동안 짊었던 자신의 십자가에 대해 자기가 죽을 때까지 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 안젤리카 원장수녀. (사진 출처 = CNS)

안젤리카 수녀원장은 1923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리타 리조였다. 부모님이 이혼했기 때문에 그녀가 다니던 학교의 수녀 선생들은 그녀를 경멸했다. 어린 그녀는 “그들을 증오했다.” 1929년에 그녀는 “대니 보이”를 부르면서 무대에 처음 올랐다. 앨 졸슨이라는 가수의 목소리와 스타일을 흉내 내면서. 리타는 공립고등학교 고학년 때 밴드에서 드럼 연주를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졸업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1934년에 무너져 내렸다. 삼촌이 그녀의 어머니를 두고 “게으른 여자”라고 하자 그녀는 식빵 칼을 집어 삼촌에게 던졌다. 그녀는 자기가 누군가를 죽일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경고였다. 아버지는 병든 아내와 딸을 알아서 살라고 내버리고 떠났다. 1961년에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따라 딸의 수도원에 입회했다.

더 깊이 파 보기 위해, 나는 레이먼드 아로요가 쓴 “한 수녀, 그녀의 담력, 그리고 기적들로 이뤄진 방송망의 놀라운 이야기”(2004)를 읽어봤다. 이 책은 정중하지만 그녀의 속살도 잘 드러낸다. 내가 1994년에 앞서의 <NCR> 기고문을 쓴 뒤, 그리고 안젤리카 수녀가 은퇴한 뒤로 교회와 세상은 급속히 변했다. 그녀의 이미지는 여전히 여러 화면에 나왔지만 그 사이에 미국 수녀회들은 교황청의 조사를 받아내어 새로운 활력과 존중을 지닌 채 살아 남았으며, 여성 신학자들은 여러 대학의 학문을 더 풍요롭게 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장해 신자와 비신자들에게 환경, 정의, 그리고 기혼자의 사랑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기하여 교회의 이미지를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세 번의 충돌 사건

1993년 8월 13일, <EWTN>은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를 방송했다. 원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오지 않고 대신에 한 추기경이 대리로 와서 십자가의 길 전례를 주례하였다. 신시내티에서 온 한 무언극단이 출연한 야외극이 극의 절정에 이르고, 길고 하얀 통옷을 입고 예수 역을 맡은 배우가 십자가 위에 올려졌을 때, 청중들은 깜짝 놀랐다. 그 “예수”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이에 안젤리카 수녀는 너무 격분해서 밤새 울며 기도하면서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하느님께)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이는 모두 여성사제 주장을 퍼뜨리기 위한 음모의 한 부분이었다. 미국 주교회의는 이 연극에 대해 “무언극은 (연극일 뿐) 어떤 역사적 사실을 재현한 것이 절대 아니다. 그 누구든, 설사 어린애일지라도, 그 극에 나오는 어떤 역할이든 맡을 수 있다.”는 설명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그 배우들만 비난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리버럴”(liberal, 진보파)이라고 상상한 모든 사람을 다 직접 거명하며 고발하고 나섰다. “나는 신물난다. 궁지로 몰리는 데 지쳐 신물난다. 하느님의 아들은 남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당신의 포용 용어에 신물난다! 당신이 쓰는 속임수들에 신물난다. 당신의 기만에 신물난다. 당신에게 신물난다.... 소란을 일으키고, 거기엔 당연히 구멍이 있고, 우리 모두는 그 안으로 떨어지지.... 나는 당신에게 진짜 진절머리가 나, 이 리버럴 미국교회야.... 당신은 병들었어.... 당신은 줄 게 아무 것도 없어. 단지 파괴할 뿐이지.” 그녀는 펄펄 끓어대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더욱더 말했다.

그러자 밀워키 대교구의 렘버트 위클랜드 대주교는 이렇게 선언했다. “(안젤리카 수녀의 말은) 내가 들어본 말 가운데 가장 불명예스럽고, 그리스도교인답지 못하며, 불쾌하고, 불화를 일으키는 욕설들이다.” 그러자 안젤리카 수녀원장은 위클랜드 대주교가 “머리를 변기통에 처박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자기가 너무 리버럴하다고 생각한 미국교회에) 대응한 또 다른 상징적 행동으로는 자기 수도회의 수녀복 디자인을 바꾼 것이었다. (편집자 주- 미국 수녀회의 80퍼센트는 우리가 흔히 아는 수녀복이 아닌, 검소한 평복을 입는다.) 모자에 머리수건이 달리고 검은 베일까지 있어서 얼굴을 모두 가리었을 뿐 아니라 목과 귀까지 덮었다. 그리고 이마에 두꺼운 흰 띠를 둘러서 머리선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한 수녀는 그렇게 하니 마치 “상자 안에” 있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안젤리카 수녀가 수녀복을 바꾼 목적이 바로 그거였다. 지적으로 상자에 가둬서,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볼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봉쇄수도원 안에서 장상으로서, 그녀는 소속 수녀들이 더 이상 텔레비전을 봐서도 안 되고 신문을 읽어서도 안 된다고 지시했다. 자기 수녀들이 알 필요가 있는 것은 자기가 말해 줄 것이었다.

1997년 11월에, 그녀는 오푸스데이 소속의 한 사제와 인터뷰하면서 “캘리포니아의 추기경이 (성체성사에 쓰이는 밀떡과 포도주는) 성체성사 전이나 후나 그대로 빵과 포도주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교구 안에서 내가 전혀 순명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 교구 안의 모든 이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문제가 된 내용이 들어 있는 책의 저자로서 당시에 로마에서 주교 시노드에 참석 중이었던 로저 마호니 추기경은 몹시 화를 내며 안젤리카 수녀에게 “당신 TV의 시청자들에게 로스앤젤레스의 대주교 추기경은 (빵과 포도주가 성체 변화 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 현존한다는 (교리를) 진짜 온전히 믿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그녀는 사과는 했지만 자기 발언을 바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마호니 추기경이 1997년에 쓴) 주일미사 안내서인 “함께 신실하게 모입시다”(Gather Faithfully Together)를 비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는) 실체변화에 관한 설명이라고는 (본문에는 없고) “아주 작은 각주” 하나뿐이며, 자기는 (책을 읽을 때) “각주는 읽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런데 안젤리카 수녀의 이 말은 말이 안 된다. 내가 직접 그 문서를 읽어 봤다. 모두 31쪽으로 미사의 각 단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각주는 하나도 없다. 마호니 추기경은 (본문에) 이렇게 썼다. “그러니, 사람들은 성령께서 오시어 이러한 선물들과 자신들을 변화시키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빵과 포도주라는 간단한 선물들 안에, 그리고 이 교회인 그 신비 안에 그리스도가 존재하심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코린토서를 인용한 부분을 다시 인용해서 이렇게 썼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 이렇게 말로 싸우느니 (안젤리카 수녀가 방송사를 운영하고 있었으니) 실제 텔레비전 방송에서 마호니 추기경과 안젤리카 수녀, 그리고 기자 한 명과 신학자 한 명을 같이 앉혀 놓고, 모두 이 31쪽짜리 문서를 다 읽어 본 뒤, 시청자들에게 성체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한다는 교리에 대해 실제 교육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마지막 싸움은 1999년에 버밍햄 교구의 데이비드 폴리 주교와 붙은 것이었다. 폴리 주교는 전에는 그 자신이 (안젤리카 수녀의) 수도원 안에서 (신자석을 뒤로 한 채) 제대를 보고 미사를 집전했었는데, 이제는 교구장으로서 권위를 행사하여 신자를 바라보고 미사를 드리도록 했다. 안젤리카 수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폴리 주교는 미국 주교회의와 두 번이나 협의한 끝에 마침내 교령을 발표하여 앞으로 모든 미사는 (제대석이 없는) 제대에서 신자들을 마주 보고 집전하도록 했다. (편집자 주- 이 교령은 <EWTN>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EWTN>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 뒤 로마와 의견이 오가고, 안젤리카 수녀 지지자와 폴리 주교 지지자 사이에 분열도 있었지만 결국은 폴리 주교가 이겼다. 안젤리카 수녀원장은 (합의)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곧이어 일주일에 두 번 생방송에 나가는 것을 빼고는 <EWTN>에도 나가지 않았다.(2000년에 경영에서 물러나, 평신도로 구성된 이사회에 경영권을 넘겼다.)

그리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안젤리카 수녀는 또다시 뇌졸중을 맞으면서 15년간 외로운 고난의 세월에 접어드는데 그녀는 그 고난을 기도로 변화시켰을 것이다.

마지막 미사

그녀를 위한 장대한 미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어둠 속으로 참석자들을 끌어당겼다. 성가대가 노래를 대부분 라틴어로 부르는 동안, 주교 세 명과 사제 네 명이 장례미사의 주 집전자가 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그 몇 걸음 뒤에는 수많은 사제가 공동집전자로 끝도 없이 늘어섰으며, 여기에 더하여 긴 성직자복에 중백의를 걸친 남자들이 길게 늘어서서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하는데, 제대를 바라보고, 신자들을 뒤로 하고 섰으며, 제대 난간 앞에 무릎을 꿇거나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혀 위에 성체를 놓아 주었다. 평신도로서 성작에서 성혈(포도주)를 받아 마신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와 자신들이 믿는 것은 2016년의 교회가 아니라 1957년 교회의 것이었다고 확인했다. (편집자 주- 대부분의 미사에서는 영성체는 그리스도의 몸인 하얀 밀떡(성체)만 주지만 본디는 그리스도의 피인 성혈(포도주)도 함께 마신다. 하지만 중세 교회에서는 미사 중에 포도주를 마시다가 엎지르는 일을 피하고, 그리스도의 전체를 받으려면 반드시 두 가지를 다 받아야만 한다는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기 위해 성혈은 성직자만 마시는 관습이 생겨 600여 년을 이어졌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성직자만의 특권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현대 교회는 성체성사는 밀떡만 가지고도 충분하지만 평신도에게도 여건이 된다면 성혈도 함께 마시도록 권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당한 수난을 상기하고 초대교회 신자들이 감수한 순교를 지금 자신의 현실에서 기억하기 위함이다.)

<EWTN>이 저널리즘을 제대로 실천하는 ‘언론’으로 보이길 원하는지 아니면 그저 모회사인 <National Catholic Register>와 이 둘을 지원하는 단체인 콜럼버스 기사단의 스피커 노릇, 즉 가톨릭판 <폭스뉴스>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지난 금요일 밤 뉴스에서는 15가지 뉴스를 다뤘는데, 깊이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며칠 전에, <EWTN>의 (프란치스코회가 운영하는) 스튜번빌 대학 프로그램에서는 남자 네 명이 나와서 자비의 사업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교도소 방문”, 즉 교정사목에 대해 얘기하면서, 한 참석자는 연옥이 교도소와 같기 때문에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제안했다. 교도소 개혁이나 사형제, 또는 교도소에서의 잔학행위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다.

사도신경에 관한 또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파블로 스트라우브 신부(구속주회)는 “(예수님이) 저승에 가시어”(descended into hell)의 뜻은 아담과 이브, 아벨, 야곱, 그리고 그의 열두 아들과 모세 등이 천국으로 가도록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유명한 신학자인) 카를 라너는 “저승에 갔다는 것은 그저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뜻”이라고 쓴 바 있다.

주교들과, 튼튼한 미디어와 신학, 사회정의 프로그램을 갖춘 가톨릭 대학들, 그리고 재단들이 머리를 맞대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환경과 정의 그리고 평화에 관해 내놓은 과제들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옛 향수와 지적 고립보다는 마음과 영혼에 와 닿는 호소력 있는 언론매체를 만들 수는 없을까?

방송언론의 수호성인인 에드워드 머로우는 1958년에 티브이 뉴스책임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텔레비전이라는) 이 도구는 가르칠 수 있고, 계몽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나아가 고무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이 텔레비전을 그러한 목적으로 쓸 의지가 굳건할 때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텔레비전은 그저 텔레비전 상자 안에서 반짝거리는 빛과 전선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레이먼드 슈로트 신부는 예수회 소속으로, 미국 예수회가 내는 주간지 <아메리카>의 편집인이다.)

기사 원문: http://ncronline.org/news/art-media/can-catholic-tv-move-beyond-mother-angelicas-le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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