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5월 22일(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오늘 복음은 예수님, 성령, 그리고 하느님이 서로 어떤 관계 안에 계시는지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절망하여 흩어졌던 제자들은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각자 체험하면서 다시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과 일을 함께 회상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평소에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깨달음과 더불어 제자들은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예수님이 사셨던, 하느님의 생명을 그들도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된 자의 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 자녀됨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살자고 가르칩니다. 그 가르침이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 신약성경의 문서들입니다.

제자들은 그들 안에 일어난 변화를 하느님의 영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변화는 그들이 예기치 못한 새로움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새로움이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그들 안에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던 구약성경 시편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104,30). 하느님의 입김이신 성령은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살려내고 인간 삶의 모습을 새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그 시편이 말하는 바를 예수님의 입을 빌려 새롭게 표현합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 안에 나타난 진리, 곧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16,13-14).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에 관해 제자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새롭게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16,15)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깨닫는 일은 실제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린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제자들 안에 하느님의 숨결을 살아있게 하여, 그들이 예수님 안에 보았던 삶을 하느님의 것이라고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제자들 안에 일어난 새로움이었습니다.

▲ '삼위일체', 루블료프 안드레이, 1410. (이미지 출처 = wikiart.org)
오늘은 삼위일체 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세 분이신 하느님이 오묘하게 하나로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삼위일체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믿으라고 하늘에서 내려준 단어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사실을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단어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있었고, 제자들 안에 오신 성령은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 그들도 같은 숨결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제 하느님을 생각하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사셨던 예수님,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 그리고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이렇게 세 개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분이신 야훼를 믿었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는 말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 한 분뿐이시다'(6,4). 그들은 또한 하느님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었다'(창세 1, 2)는 말씀도 알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삶을 회상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분이 아버지라 불렀던 하느님의 생명이 그분 안에 실제 살아 계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그들은 유대교를 떠나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성령이 하신 새로움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하느님과 관련지어 사용하는 호칭은 세 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들 안에 숨결과 같이 살아 계신 성령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은 기도로 코린토의 신앙인들에게 쓴 편지를 끝맺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2코린 13,1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세 분의 이름을 들어 축복의 인사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서 생긴 주장입니다. 그리고 또 성령은 격이 낮은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잘못된 주장들을 반박하기 위해 신앙인들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이고, 신앙인 안에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삼위일체라는 단어로써 말하고자 한 것은 예수님 안에 우리가 알아보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과 다르지 않고,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살아 계신 성령도 실제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하느님과 우리가 얼마나 다양하게 또 깊이 연결되어 있는 지를 고백합니다. 이 단어는 세 분이신 하느님이 하나로 뭉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어떤 의미로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지를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또 하느님은 당신의 숨결을 우리 안에 주셔서 그 숨결로 우리가 당신의 참다운 자녀되어 살도록 하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하느님이 세 개의 단어로 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추상적 이론이나 객관적 지식을 주지 않습니다. 그 단어는 하느님이 인류 역사 안에 다양하게 또 은혜롭게 일하셨고, 현재에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렇게 세 분의 이름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은혜롭게 또 다양하게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귀감으로, 성령을 숨결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 되어 삽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세 개의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존재의 기원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되어 삽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삼위일체는 이렇게 밀접하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말합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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