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교황청 성덕심사 통과, "일상 복음실천" 중요

▲ 최양업 신부 동상. 걸어서 사목방문에 나서는 모습이다. (사진 제공 =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토마스)가 가경자로 선포됐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시복을 추진 중인 증거자 최양업 신부(1821-1861)의 시복 안건이 2016년 3월 14일 교황청 시성성 성덕 심사를 통과함으로써,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성성 교령을 승인했다고 28일 밝혔다.

‘가경자’는 시복 심사 중에 영웅적 성덕이 인정된 ‘하느님의 종’에게 붙이는 존칭으로, "존경해도 되는 이"라는 뜻이다. 다음 단계로 그의 전구를 통해 일어난 기적의 하나가 인정되면, '복자'로, 또 하나가 더 인정되면 '성인'으로 선포된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 추진은 약 20년 전 청주교구 배티 성지에서 시작됐으며,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한국 천주교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작업을 통합해 진행하기로 하면서, 최양업 신부 시복도 함께 추진됐다.

최양업 신부는 이미 시복시성이 된 다른 순교자와 달리 순교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의 성덕으로 복음을 증거한 '증거자'로서, 최양업 신부 현양은 '순교'에 치우치기 쉬운 한국교회 신앙생활에 균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는 한국교회 첫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다. 1821년 3월 충남 청양 다락골 인근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난 최양업 신부는 1835년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한국 최초 신학생으로 선발돼, 1836년 12월 3일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842년 김대건과 함께 만주 소팔가자로 이동해 학업을 이어갔고, 1844년 김대건과 부제품을 받는다. 김대건 신부가 먼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뒤, 병오박해와 김대건 신부 순교 소식을 들은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사제품을 받고 12월 3일 귀국했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직후부터 전국의 신자 공동체를 방문해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주며, 1850년부터 11년 6개월간 쉼 없이 사목방문을 했으며,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순교자들의 기록을 수집하기도 했다. 1861년 경남 지역 사목방문을 마친 뒤 최양업 신부는 주교에게 결과 보고를 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로 6월 15일 40살의 나이로 죽었다.

최양업 신부는 당대 유일한 한국인 사제로서 신자들을 위해 전국을 누빈 ‘땀의 순교자’로 불린다.

▲ 청주교구 배티 성지에 있는 최양업 신부의 사제관 터. (사진 제공 =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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