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25]

많은 독자가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터이다. 나도 세 번째 대국에서 승부가 결정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답답했다. 아직은 그래도 인간이 이기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무너진 것이 첫째 원인이었고, 이 정도 기술이면 인류 미래가 그리 밝지 않으리라는 우려가 둘째 원인이었다.

사실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정보사회의 윤리 문제에 대해 썼고, 4년 전에는“디지털 영성”이라는 책도 낸 바 있다. 이 때문에 이 사태에 대해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한 마디를 보탤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테크늄

케빈 켈리가 쓴 “기술의 충격”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문명사, 더 정확히는 기술의 역사와 철학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술이 진화의 정점을 향해 가면서 인간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자율성을 가지고 인간과 무관하게 스스로 진화하는 측면이 있음을 밝힌다. 그동안은 인간이 기술을 개발하고 또 이 기술이 들어간 도구를 발명하는 단계였는데, 이제는 기술이 다른 기술과 기계를 발명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기술과 기계들이 범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인간이 살아가는 생태계처럼 하나의 거대한 기술계를 형성하는데 저자는 이를 테크늄(technium, 전지구적으로 상호 연결된 기술계)이라 불렀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 인터넷은 전 세계 수억 대 컴퓨터가 통신이 가능한 전용 케이블, 무선, 전화선으로 연결되어 상호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전자적 연결망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터넷은 무려 17경에 달하는 컴퓨터칩(우리 뇌의 뉴런 수와 맞먹는다), 우리 몸의 시냅스 연결 숫자와 맞먹는 파일들 사이의 연결 수, 30조 개의 인공눈(휴대전화와 웹캠 등)을 끼고, 전 세계 전기의 5퍼센트를 소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기술들과 융합을 거듭하며 인간의 사고, 행동을 변화시키고 궁극에는 다른 기술과 기계를 개발하도록 만드는 단계에 이르렀다. 기술이 기술에 명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물 인터넷은 이 기술의 초기 단계다.

▲ 사물인터넷 이미지. 사물인터넷이란 원격 검침, 스마트홈 등의 분야에서 사물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정보를 공유하고 활용하는 네트워크 기술이다.(이미지 출처 = pixabay.com)

그의 말이 옳다면 이제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이나 기계들은 우리 스스로 원해서 채택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어느 순간 우리가 거부할 수 없게 된 일일 수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스스로 이러한 선택을 하는지, 아니면 강요당하는지도 모르게 이 기술계에 적응하는 셈이다.

알파고는 이 기술계를 형성해 가는 기술이자 기계 가운데 하나다. 이대로 가면 테크늄이 더 빨리 도래하고, 그 위력도 훨씬 강해질 것이다. 당연히 테크늄이 지배하는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일 가능성이 높다. 가장 최악의 디스토피아는 인간 대 기계가 대립하는 상황이다. 나쁘긴 마찬가진데 그나마 이 보다 나은 시나리오는 소수 빅브라더가 다수 인간을 지배하는 상황이다. 후자의 일은 이미 지금 일어나고 있다.

테크늄과 종교

기술이 이렇게 진화하였음을 확인했으니 종교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해석해 신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답을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를 따르면 된다고!”

아마도 이 신기술에 대해 종교가 보일 반응은 대략 세 가지일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 ‘이런 기술을 멀리하라!’는 입장이다. 써 봐야 이로울 게 없으니 아예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미국의 아미시(Amish) 교파가 취하는 입장이다.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일부 종파형(sectarian) 교파들은 이전부터 그래왔듯이 이 사태를 우주적 종말의 전조로 해석할 가능성이 높다. 드디어 ‘666’이 실체를 드러냈으니 사탄이 인류를 노예로 삼을 날이 머지않았다고 주장하리라는 말이다.

이미 여러 종파가 이런 태도로 사소한 기술의 진화에도 호들갑을 떤 일이 여러 번 있으니 알파고와 같은 메가톤급 충격에는 훨씬 더 마음이 급해질 터.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몇 번은 Y2K 소동(서기 2000년 1월 1일이 되면 기존 컴퓨터들이 네 자리수 연도를 인식하지 못해 전 세계적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걱정으로 일어난 사회적 혼란) 때와 같은 일을 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 이러한 기술을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태도다. 개신교와 같이 기술친화적 교파들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이를 선교에 활용해 왔다. 기술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입장인 셈이다.

그러나 이 기술은 기존 기술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 우선 종교 쪽에서 이 기술의 속성을 이해하기 쉽지 않고, 더욱이 정신의 영역을 다루고 있어 과거 신체 기능의 일부를 확장하는 기술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해서 종교는 이 기술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만도 벅찬 위치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 기술의 실체를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응하려는 입장이다. 종교인 과학자들의 입장이다. 신앙심이 깊은 과학자들은 이런 상황도 계시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어떤 경우든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일들로 이 사태를 해석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 입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동료 과학자들조차 이들의 시도에 동조하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들도 이러한 시도를 종교인의 아전인수격 해석이라 본다.

이미 종교가 인간의 여러 지적 성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고, 해석도 군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마다 지성인들이 종교를 버렸으니 과거와 다른 해석을 내놓지 못하게 되면 종교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의미 체계로서의 기능과 지위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 매트릭스 이미지.(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종교의 미래

이런 사태가 더 빠르게 진행되면 종교에는 무엇이 남게 될까? 다들 궁금해 하는 문제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비가 기술 진화의 결과로 민낯을 드러내면 ‘의미(혹은 해석)의 위기’가 찾아올 테고, 이 위기에서 종교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적어도 새로운 의미 체계를 기대했던 이들은 종교를 떠날 터이다. 이 경우 남은 이들은 과거의 해석체계에 더 매달리거나. 지난 번 다루었던 점술 산업의 부흥과 같은 사태가 전개될 것이다.

종교가 공동체로 기능하는 건 가능성이 있다. 기계가 대체하지 못할 유일한 영역이 살아 있는 인간들의 접촉이니 말이다. 이른바 휴먼 서비스다. 물론 이 휴먼 서비스도 경쟁하는 다른 방식들이 더 세련되게 발전할 수 있으니 신자들이 이를 얼마나 극복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

혹자는 영성이 종교의 최후 영역이라 말한다. 적어도 이 영역만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역도 쉽지 않으리라 본다. 이미 종교인들은 자신의 수련의 결과로 존재의 문제를 해석하기보다 이미 인문학적 테크놀로지화 된 심리학에 기대고 있다. 알파고처럼 인간의 심리도 다양한 알고리즘으로 풀어내게 되면 그나마 종교가 설 자리는 없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럼 유일한 해결책은 신비주의인가? 유사 체험을 가능케 하는 시도들이 활발하겠지만 진정한 신비와 깨달음은 소수의 영역이다. 특히 신비는 인간이 호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기댈 대상은 오로지 지성이 떨어지는 이들뿐인가? 아니면 고도의 영성에 이른 소수의 종교적 엘리트들뿐인가?

아마 나의 추측이 너무 앞선 것일지 모른다. 아니 앞선 것이면 좋겠다. 그만큼 종교가 대응할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불길함이 앞선다. 그동안 종교들이 대응해 온 방식을 봐 왔기 때문이다. 너무 수세적이고 게을렀다. 답을 찾으려 애쓰기는커녕 저절로 해결되거나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그 결과는 늘 분명했다. 종교의 영역이 좁아진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도 이 문제뿐 아니라 여러 문제에서 신자들이 겪는 의미의 위기, 이른바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한 해석의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냉담의 원인은 여기서 비롯되고 있다. 사제단 신부들의 강론 때문이 아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이 해석의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더 큰 문제를 보고 어느 것이 교회의 미래를 위해 더 중요한 선택인지 힘을 모아야 한다. 일부 사제들을 조용히 시킨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