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3월 13일(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오늘 복음 이야기의 무대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하느님이 거처하신다고 유대인들이 믿던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그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앞에 놓고 앉아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시골 나자렛 출신 젊은이로서 사실은 성전에서 가르칠 수 없는 신분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그들이 이해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각색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에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모세의 법(신명 22,22-24)을 내세워 그 여인을 돌로 치려 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오는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부인, 그들이 어디 있소? 아무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았지요?” 그 여인이 “아무도 안 했습니다, 주님.”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하느님의 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 그리스도', 프란체스코 아예.(1841)

사람들은 하느님과 율법을 빌미로 사람을 단죄하고 죽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당신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의 잘못은 잊어버립니다. 이 사실을 마태오 복음서는 “형제 눈 속의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마태 7,3)고 표현하였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그렇게 일관성이 없고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이웃에게 돌을 던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요한 복음서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약 70년이 경과된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초기 그리스도 신앙공동체가 그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집필한 복음서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대교는 율법을 지킬 것을 강요하지만, 사실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사람의 죄를 용서하며 살리시는데, 유대교는 하느님과 율법을 빙자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며, 당신의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 주신 삶의 지침이 십계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근거로 율법을 만들었고 그것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인류 역사에 제일 먼저 집필된 법전이 함무라비 법전입니다.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집필하게 한 것입니다. 그 법전이 기본으로 삼은 것이 ‘눈에는 눈으로 갚고,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소위 동태복수법이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잘못한 그만큼 앙갚음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 사회가 제정하는 법들은 함무라비의 것보다는 많이 세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본에는 동태복수라는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다만 개인 각자가 잘못한 이에게 복수하는 대신 국가공권력이 잘못한 이를 잘못한 그만큼 벌을 주어 복수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 잘못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예나 오늘이나 같습니다. 그것이 인과응보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른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질서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벌을 주고 복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베풀고, 용서하고, 살리는 자비의 질서 안에 계십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그 생명이 보여 주는 바를 빛으로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빛으로 삶을 비추라는 말씀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오늘 우리가 들은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내 말속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8,31-32)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진리를 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단죄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은 인과응보가 요구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악순환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참으로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 사회의 질서를 따라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을 좋아하고, 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 앞에서는 강합니다. 나 한 사람 잘되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하고, 허세도 부리며, 무자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멀리합니다. 그것은 동물 세계가 지닌 질서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종족을 유지하기 위한 질서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모세의 직관이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이 사는 동물 세계의 질서를 벗어나 하느님의 질서를 받아들이라고 초대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질서입니다. 하느님은 선한 분이십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주는 악,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하는 복수의 악이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안에는 악이 순환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유로우십니다. 그 자유를 배워 살라는 초대입니다.

오늘 복음의 유대인들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들은 자비와 사랑을 잊으면서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자비와 사랑을 잊으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돌로 치려 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하고 살리면서 하느님을 잃지 않은 사람이 참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누리는 자유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살아서, 인류 안에 자리 잡은 악의 순환에서 벗어나고, 참으로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우리에게 권합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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