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2월 21일(사순 제2주일) 루카 9,28ㄴ-36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 세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대화합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보게 된 과정을 알립니다. 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말은 구약 성서에 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본, 그분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특별한 교감을 하며 살았던 분입니다. 오늘 복음이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킨 것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을 알아듣는 데에 그분들의 역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깨달음으로 발족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데, 그 함께 계시는 양식이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면서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셔서 세상에 생명이 태어나고 자랍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인류역사 안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계약을 맺었다고 구약 성서는 말합니다. 모세의 가르침이 있어 이스라엘사람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 안에 모셔 들이고,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계약은 두 당사자가 앞으로 할 행동 양식을 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은 앞으로 계속해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겠고,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충실히 실천하지 못했을 때, 예언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말하면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사람입니다. 왕이나 사제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으로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할 때, 예언자들은 그들을 비판하면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시대 기득권자들로부터 박해당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살아 계실 때, 당신 자신에 대해 가르치거나 당신의 권위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간질 환자나 정신 분열환자들을 마귀 들렸다고 말하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연장한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한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일부 사람들은 그분을 예언자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그분을 “나자렛 출신 예언자”(마태 21,11)라고 환호하였다고 전합니다.

▲ 2010년 김장 담그기 봉사활동에 참여한 서울대교구 조규만 보좌 주교. ⓒ지금여기 자료사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모세로부터 시작된 믿음, 곧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삶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실천되는 삶의 공간이 하느님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다 생명을 잃었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의 일에 충실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말하고자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산에서 그분과 교감하는 예수님은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그들과 말이 통하는 분입니다. 그분들로 말미암아 발생한 구약신앙의 전승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곳에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엉뚱한 제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에 혼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아듣는 것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서 들렸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알려면,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뒤 깨달은 바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었습니다. 하늘나라의 호적을 보았거나, 유전자 감식으로 친자 확인을 하였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병을 고친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구실만 있으면,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며 사람들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죄인에게는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면서 그들을 살렸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종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친구라 불렀습니다.”(요한,15,15)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인에게 순종하는 종이 되어 미성숙하게 살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는 친구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친구는 친구로부터 정보를 받아 자유롭게 그것을 활용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정보를 당신으로부터 받은 우리도 자유롭게 실천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믿음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있어,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분의 죽음이 그분을 결정적으로 알아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삽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빌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웃을 형제자매로 생각하고, 그들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일을 합니다. 아버지를 소중히 생각하는 자녀는 아버지의 다른 자녀들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늘의 선언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신앙입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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