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3월 6일(사순 제4주일) 루카 15,1-3.11-32

예수님 시대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모두 죄인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런 죄인들을 엄하게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이 내리는 벌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는 전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을 우리 생명의 기원이고, 우리를 돌보아 주고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인간답게 사는 길을 배우듯이, 사람도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이웃을 돌보아 주고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산다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사들이 예수님에 대해 불평합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실세들이 하느님을 벌하시는 분으로 상상한 것은 인간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예뻐하고, 잘 듣지 않는 사람을 싫어하는 인간의 관행입니다. 인간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한 나머지 그들은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죄인에게 내리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과응보에는 자비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과응보 질서를 초과하는 하느님 자비의 질서입니다. 이 세상의 부모들이 자녀를 키울 때도 인과응보의 질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자비롭게 대하며 사랑합니다. 부모의 그런 자비와 사랑이 있어, 이 세상의 자녀들은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어떤 아버지이시며, 그 하느님이 지향하는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십니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집을 떠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방탕한 삶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배가 고픕니다. 아버지의 집에 종이 되어서라도 굶주림을 해결해 보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옵니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가서 쾌락에 심취하여 살았습니다. 재물이 없어지자, 그는 이제 배가 고픕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종들이 먹는 음식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옵니다.

▲ '돌아온 탕아',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60)

그 아들에게 아버지는 유산을 주는 인물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는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서 할 말을 미리 준비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루카 15,19) 그는 아들이기를 포기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도 없고, 아버지의 아들 되어 아버지와 함께 살겠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는 오로지 굶주림을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집으로 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는 말합니다.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아들로 대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아버지는 잔치를 벌이라고 명령합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오늘 복음은 이 말로써 아버지를 버린 아들은 죽은 것이고,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살아 있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의 큰아들은 아버지를 버리지도 않았고, 충실하게 아들 노릇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식으로서 지켜야 할 바를 다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큰아들은 아들과 함께 있고 싶은 아버지의 사랑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준해서 생각하고,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지킬 것을 다 지키지 않은 아우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을 용서하며, 받아들이는 아버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 유대교 실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형제를 죄인이라고 버리면서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자비로운 하느님을 자기 생명의 기원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 앞에 지킬 것을 다 지켜 벌 받지 않는 길을 모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어머니의 역할도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기에, 하느님의 질서,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자비를 배우고, 익혀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의 질서를 배워서 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자비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병자를 만나면 고쳐 주고, 마귀 들렸다고 말하던, 간질 환자나 정신질환자를 만나면 그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 안에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불쌍히 여기셨다’, ‘가련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는 언급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른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따뜻한 마음들이 있어 우리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더 살맛나고 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발생시킬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행복하게 하라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상입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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