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발터 카스퍼, 최용호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5

소희숙 수녀(스텔라)가 지은 “지금 나의 삶은 아름다운가”(책읽는수요일, 2012)에 모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소 수녀는 “하느님께서 모기를 왜 창조하셨는지 지금도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인도에서 날마다 모기와 전쟁을 벌였고, 기도를 하다가도 모기 소리만 나면 벌떡 일어나 모기를 잡았다. 그때마다 패잔병은 “나였다”고 말한다. 인도의 수녀들은 “죽이니까 그들이 복수하는 것! 죽이지 말고 그냥 날려 보내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도저히 가려움증을 참을 수 없는 소 수녀는 어김없이 밤마다 모기와 전쟁을 치르고서도 매일 밤 피가 날 때까지 긁어대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고 말한다.

모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소 수녀는 급기야 “없애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친구가 될까? 독사도 친구가 되면 물지 않는다던데. 영원한 적은 같이 살아가야 하는 걸까?” 실토한다. 생쥐랑 친구로 한 이불 속에서 살았다는 동화작가 권정생 이야기가 문득 생각난다. ‘아힘사’ 불살생을 강조하는 종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닌 모양이다. 평화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넘어서면서 다가온다는 깨달음까지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견뎌야 할까, 잠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웬수같은 ‘모기’마저 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느님의 자비는 시작되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하느님은 햇발처럼 명징하게 오지 않고, 달빛처럼 ‘어둠을 밀어내지 않는 은은한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비를 품은 교회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로 여겨지는 것이지 않겠나, 생각한다.

▲ "자비", 발터 카스퍼, 최용호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5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했을 때, 그가 생각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였고, 그런 교회는 자녀들을 위해 고통을 견디면서 “그래도 괜찮아”하며 희망을 지긋이 선포하는 교회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비로운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믿는 교회다. 애끊는 사랑으로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그치지 않는 교회다. 자식을 키워 본 사람은 안다. 자식들이 항상 부모에게 사랑스럽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래도 그런 자식마저 끌어안고 가는 게 ‘모정’이다. 그래서 교회의 운명은 ‘사랑스럽지 않은 이들을 사랑하는 용기’에 달려 있다. “교회가 스스로 자비를 실천하고 증언하는 것이 교회와 그 메시지의 신뢰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자비의 얼굴, 12항)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거듭 말한다. 이런 교황의 생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 있다면,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자비”다. 2012년에 쓴 이 책이 2015년 가톨릭출판사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우리보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먼저 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다.

교황은 참혹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고, 이 책은 자비가 세상을 바꾼다고 했으니, 그분에게 매력적인 언질을 준 셈이다. 그래서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자비”와 교황 프란치스코의 ‘자비의 얼굴’을 대조해 보면, 골자는 어김없이 겹친다. 두 사람이 한 생각이다.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자비야말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다. 자비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약간만 더 자비로워지면 세상은 덜 추운 곳이 되고, 더 정의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이사야 예언자는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하느님의 사랑은 그것을 눈같이 희어지게 하리라고 했다는 것을요. 자비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발터 카스퍼는 “자비”와 관련해 교회가 위기에 놓여 있다고 했다. 교회를 두고 ‘자비롭다’고 느끼는 사람이 그다지 없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프란치스코 교황 이후로 역전되었을 것이다. 가난과 차별과 배제에 대한 교황의 엄중한 경고, 그리고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과 사회회칙 ‘찬미 받으소서’가 교회의 심장에 불타고 있었으나 은닉되어 있던 ‘하느님의 자비’를 상기시켰으며, 자비의 특별희년 선포로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가 비판했던 ‘고상한 노신사의 교회’가 풍기는 냉정한 기득권자의 모습을 교회가 벗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자비”에서 “실제로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관해 새롭게 해 줄 말이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황의 생각과 상관없이 지역교회, 그중에서도 한국교회의 수장들은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거리’를 태연히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 등이 광화문에 나타났을 때, 세월호 관련자들이 이들에게 보여 준 냉담한 태도가 그들의 ‘거리두기’를 고발하고 있는 것과 같다. 사실상 세월호 가족들이 고통 받고 있는 동안, 교황 방한의 여파가 남아 있었던 몇 달 동안 한국교회 주교들이 잠시 잠깐 보여 준 관심이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전부였다면, 한국교회는 하느님에 관해 여전히 침묵해야 한다. 하느님은 자비이시고, 그분 자비를 몸으로 담아 내지 못하면서 입에 담는 ‘하느님’ 발음은 불경하기 때문이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자비의 새로운 이름으로 ‘컴패션’(compassion)을 제안한다. 캐런 암스트롱은 자신의 많은 저작에서 모든 종교의 깊은 곳에 있는 근원적 키워드가 ‘컴패션’이라 했다. 여기서 컴패션은 ‘공감’이라는 의미로서, 단순한 감정적 동정이나 실속 없는 자비와 다르다. 그 단어에는 ‘열정’이라는 뜻이 숨어 있으며, 결국 “컴패션이란 단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파렴치한 불의에 대처하는 열정적인 태도와, 정의를 갈망하는 외침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카스퍼 추기경은 전한다.

카스퍼 추기경은 예수가 제자들과 교회를 세상에 파견하셨듯이, “자비에 대한 복음은 개인의 사적인 영역과 교회의 내부 영역에만 국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교회는 제의실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 누룩이어야 하고, 세상의 삶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나라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 정치는 ‘신학적 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카스퍼 추기경은 키케로의 말을 빌어 “정의는 각자에게 속한 것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라면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로 이렇게 마감한다.

“정의가 없는 나라와 도둑 떼 사이에 다른 점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둑 떼 역시 작은 나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도둑 떼도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르고, 약속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철석같은 합의에 따라 전리품을 나눠 갖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카스퍼 추기경 역시 “자비에 대한 갈망이 정의에 대한 갈망을 능가한다”는 입장이다. 이른바 “정의는 최소한의 사랑이고, 사랑은 최대한의 정의”라고 카스퍼 추기경은 규정했다. 사랑은 정의로운 사회에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복지국가에서 국가는 여러모로 국민들에게 안락함을 제공하지만,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마음으로 공감하며 동정심을 나타내는 사람까지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는 게 추기경의 생각이다. 이것은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한 도러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국가의 프로젝트에 의존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이 할 일을 하는 것’을 추구한 까닭이다. 즉, 국가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그들을 도울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비와 동정과 정의는 구체적으로 불행한 타인을 도울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느님 자비를 몸으로 입는 영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카스퍼 추기경은 세속적 특권에 의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행동에 주목한다. “교회는 세상에 살며 활동해야 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따라서 세상의 방식과 기준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복지정책이란 일종의 ‘사회안전망’이라는 이기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사회의 노동력 재생산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신앙행위로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연대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하느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복지예산을 운운하지 않는다.

교회는 작고 창의적 소수집단이지만 ‘선의’만으로 충분히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보다 먼저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이 책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이상을 내걸었다. 우리는 늘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가능하지만, 가난한 교회가 되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두려워한다. 특별히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에 ‘가난한 교회’가 카타콤바에서 걸어 나와 ‘제국교회’가 된 뒤로, 교회에게 ‘가난’은 낯선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교황과 카스퍼 추기경은 한결같이 그 ‘가난한 낯선 얼굴’이 ‘그리스도의 얼굴’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남루하지만 빛나는 얼굴을 만나러 가자고 지금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하느님 자비 안에서.

한상봉(이시도로)
평신도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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