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사월이 왔다. 닿을 수 없는, 품을 수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사월. 우리는 지금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꼬박 1년 전 우리는 아이들을 물속으로 보냈다. 안개가 짙은 인천항에서 “엄마, 다녀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간 아이들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네모난 검은 액자에 들어 있는 아이들의 사진을 우리는 응시할 수 없다. 왜?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침몰 하루 전, 안개 때문에 2시간 30분 지연된 세월호는 오후 9시 인천항을 출발했다. 세월호에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 325명, 교사 14명, 일반인 104명, 선원 33명, 총 476명이 탔다. 배에 실린 차량 180대, 화물 1157톤은 적재 한도를 넘은 것이었다.

더러운 관행이었을까? 탑승객 중 304명은 결국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참사 당일인 4월 16일 수요일. 오전 8시 30분경 세월호는 맹골도와 서거차도 사이를 최고 속도로 진입한 후 지그재그로 운행하다가 8시 49분경 병풍도 부근에서 다시 급격히 항로를 바꾸어 급선회했다. 세월호는 'J'자를 그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 것일까?

학생에게 경도, 위도 물은 해경, 이미 대한민국은 혼돈

오전 8시 52분 32초. 전남 소방본부 119상황실에 최초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신고자는 단원고 학생이었고 학생의 첫마디는 “살려 주세요”이었다. 학생은 배가 침몰하고 있음을 알렸다. 당시 신고전화를 받은 상황실 근무자는 내용을 듣고 목포 해경을 연결했다. 그런데 해경은 신고자에게 현재 경도와 위도를 말하라며, 배의 위치를 물었다. 당황한 최초 신고자가 ‘네?’를 연발했다. 하지만 해경은 반복해서 위치를 물었다.

이미 대한민국은 혼돈 속을 헤매고 있었다. 아이들의 숨죽인 울음소리 그리고 죽음보다 더 무거운 침묵 속으로 소용돌이 맴돌던 날이었다. 어쩌면 4월 16일 그날 세월호와 함께 ‘대한민국’이라는 배, 돈과 명예와 권력과 이기심과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수많은 거짓으로 위장한 바벨탑은 맹골수도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루 네 번 밀물과 썰물로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맹골수도, 그 노란 바다.

▲ 세월호 침몰 사고에 관한 4월 18일자 YTN 뉴스 특보 영상 갈무리

최첨단 장비 정부는 허둥지둥, 1.1톤 민간 어선은 27명 구조

최첨단시설을 자랑하는 해경과 해군이 무언가에 홀린 듯 허둥대고 있는 동안 민간 어선 선장 박영섭은 승객 27명을 구조했다. 박 선장은 새벽 조업을 마치고 귀항을 하던 중 오전 9시 3분 긴급 구조 요청 신호를 받고, 바로 뱃머리를 병풍도 쪽으로 돌렸다. 입만 열면 예산타령을 하던 국방부와 해경의 수많은 장비들과 달리 조도면 어민 김형오는 자신의 1.1톤급 소형어선을 몰고 구조작업에 동참하여 25명을 구조했다. 그날 맹골수도에서 사고 당일 구조된 세월호 탑승자는 단원고생 75명, 교사 3명, 일반인 71명, 승무원 23명으로 모두 172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부가 수색 작업 종료를 발표한 11월 11일까지 총 209일간 처음의 끝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여전히 마무리되지 못한 끝이었다. 난파선에서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은 어이없게도 세월호의 선장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조국이라고 부르는 대한민국의 민낯이었다.

남겨진 자들, 물에서 나오지 못한 아이들에게 한때 엄마, 아빠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걸어서 기어서 심지어 철통같은 방패사이로 들어가서 내 말을 들어 달라고 청와대로 가려했지만 끝내 그곳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했다. 우리는 과연 청와대를 향해 ‘존재’라는 말을 써도 되는 것인가?

우리는 정말  원하는 것이 “오직 경제”인가

정말 그 존재는 추상이 아닌 구체적 건물이며 그곳에 사는 주인은 우리와 같은 사람일까? 말도, 글도 통하지 않는 아르헨티나 사람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족들을 가슴으로 품었지만 같은 말, 같은 글을 쓰는 그 존재의 주인은 모든 것을 잊으려 애를 썼다. 아니 악다구니를 쳤다. “오직 경제!” 사람들은 물속에 잠긴 세월호와 물속으로 사라진 아이들과 남겨진 자들의 슬픔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상황일까? 갑자기 “오직 경제!”라니. 청와대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듯 했다. 이른바 마이동풍.

얼마나 울어야 다시 돌아갈까? 얼마나 가슴을 두드려야 아이들의 수학여행은 끝이 날까? 참사 발생 94일째인 7월18일 선체 중앙 식당에서 294번째의 주검을 발견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196일째인 10월 28일 세월호 4층 중앙부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다. 그 시신이 현재로서는 마지막인 295번째의 주검이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주검 앞에서 우린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울면서 기뻐했다.

우리는 그렇게 이미 제 정신이 아닌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참사 발생 210일째인 그해 겨울 길목 11월 11일 정부는 실종자 수색을 중단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주검으로도 돌아오지 못한 9명의 희생자를 향해 “중단!”을 외치는 그들의 목은 굵었다. 목이 굵은 그들은 그 길로 돌아섰다. 그들은 다시 팽목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수색중단!”이라는 말을 그들은 마음속으로 “세월호 교통사고 종료!”라고 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365일을 보내고 사월(思月)을 맞는다.

▲ 지난해, 팽목항에서 사고해역을 바라보는 천주교, 불교 수도자.ⓒ현우석

 

 
 

김유철 (스테파노)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예총 부회장. 저서 “그대였나요”, “그림자숨소리”,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천 개의 바람”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