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성모병원과 국제성모병원 사건을 보며

지난 7월 28일 국회에서 ‘인천성모병원의 돈벌이경영과 노동, 인권탄압 실태 고발 및 개선 토론회’가 열렸다. 우선 플래카드에 적힌 ‘돈벌이경영’이란 단어 자체가 가톨릭병원에겐 뼈아프다. 지난 6월엔 인천의 또 다른 가톨릭병원인 국제성모병원도 허위 환자 유치 등 의료급여 부당청구 혐의로 병원장, 의사 등이 적발됐다. 보건의료노조의 ‘돈벌이 경영, 독재 경영, 인권유린 경영’을 하고 있는 국제성모병원과 인천성모병원을 ‘환자존중, 직원존중, 노동존중 3대 존중 병원 만들기 우선해결 사업장’으로 선정했다는 성명서가 부끄러운 이유다. 가톨릭 병원이 어떻게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까.

인천성모병원의 경우 올해 처음으로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됐다는데, 그것을 달성하려는 병원 측의 과욕에서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규모는 ‘상급’ 인권은 ‘하급’이라는 지적대로 아픈 사람을 보듬는 병원이, 직원들을 힘들게 하는 현실은 결국 종교가 영리 추구를 우선시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예수의 모범을 따라 가는 곳마다 병원과 학교를 세운 교회

교회사에서 의료사업은 교육사업과 더불어 선교의 핵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선포와 치유행위를 양대 축으로 삼아 공생활을 하셨기에 그 모범을 따라 교회의 사명으로 삼았던 것이다. 의료사업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나타나듯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여겼기에 더욱 그러했다. 교육사업은 정통 교리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로마 제국 멸망 뒤 중세시대엔 시대정신을 지키고 담아내며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바탕이 되었다.

교회는 가는 곳마다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그러한 소명의식으로 교회는 인류의 의료, 교육 분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근대 산업사회로 접어들어 의료와 교육을 국가가 국민을 효과적으로 관리 통제하는 권력 장치로 인식하면서 의료, 교육사업에서의 교회의 이제껏 주도권도 국가와 사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새로운 변화에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법,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의 현실

작금의 우리 교회 교육사업 역시 그러하다. 교회 밖에서 교회의 교육사업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만이 아니라 교회 교육사업의 주체들 역시 복음적 가치 구현이라는 목적과 취지가 실종되었다는 위기의식에 부딪혀 있다. 물론 우리나라 제반 교육 상황이 교회 교육사업의 정체성 확립에 어려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교육의 수월성을 높인다는 미명 하에 학생만이 아니라 학교 자체를 치열한 경쟁체제로 몰아넣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이 교육체제의 정점인 대학사회다. 취업률, 연구비 규모, 외국인 학생 비율 등과 같은 지표로 대학 순위가 매겨지면서 대학 본연의 기능을 잃고 있다. 정부가 ‘대기업식 대학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치열한 생존경쟁까지 펼쳐야 하는 현실에서 그리스도교 고유의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복음적 가치를 스며들게 할 여지가 있을 것인가.

교회 의료사업 역시 같은 맥락에서 위기에 있다. 심각한 것은 위기의 근본 원인이 우리나라 의료체계에 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가 의료계라고 비켜갈 리 없었다. 최근에 와서는 삼성을 비롯한 재벌기업들이 의료사업을 주도하고, 정부 역시 공공의료체계를 근본에서 흔드는 의료영리화를 적극 추진하면서 비영리 공익사업체여야 할 병원의 특성이 훼손당하고 있다.

대형병원 중심으로 대기업과 같은 경영혁신운동이 경쟁적으로 펼쳐지고 있으며, 의료 서비스에서도 상업성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공공병원 비중이 전체의 5퍼센트, 병상 수는 10퍼센트로, 70퍼센트에 이르는 OECD 회원국의 평균 병상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공공의료체제 강화보다는 의료영리화를 추진하면서 이런 돈벌이 경영을 부추기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형적인 의료체계의 중심에 가톨릭계 대형병원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이 어느덧 영리와 성과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쟁체제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가톨릭계 학교의 귀족화와 대형병원의 고급화 추세도 심각하다. 법조인 자녀들이 많이 다닌다 해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 스캔들 때 언론에 오르내렸던 강남 유일의 명문 사립 계성초등학교에서 보듯 가톨릭계 학교들의 귀족화는 우리 사회에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미지로 인해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의술에서나 시설에서나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강남에 위치한 가톨릭계 대형병원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얼마나 치유의 사도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톨릭이란 기치 아래의 이런 사업들이 가난한 이들이 교회에 다가설 수 없게 만들고 교회의 중산층화 현상에 한 몫을 하고 있다.

▲ 7월 15일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앞에서 "천주교 인천교구의 자성과 국제성모병원, 인천성모병원의 정상화를 위한 인천시민대책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이 열렸다. ⓒ배선영 기자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펼쳐졌던 예수의 의료, 교육행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료, 교육행위는 우선 무상이었고 그것도 소외받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왜 그리하셨을까.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예수운동은 소외된 이들을 이스라엘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공동체 복원 작업이었던 까닭이다. 그 시대 소외된 이들이야 가난하니 현실적으로도 무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무상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치유행위만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 대상도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렇지 않고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수께서는 제자들도 그대로 하라고 요구하신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열두 제자 파견사다. 무상성은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3-14)라는 말씀에서 드러나듯 그분 삶을 관통하는 정신이었다. 이런 무상행위가 종교 관련 모든 것에서 갖가지 이권을 챙겼던 종교권력에 미움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이유였다.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 자본에 휘둘리는 춤 멈추어야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베푼 예수 그리스도의 의료, 교육행위, 이 원칙에 지금 얼마나 충실한가를 되돌아보면서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을 근본에서부터 점검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고 그런 또 하나의 병원, 또 하나의 학교가 아닌 복음적 가치를 온전히 구현하는 병원과 학교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이 복음적 가치는 물론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공공성과 윤리의식에서도 뒤처진다면 얼마나 딱한 모습인가.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휩쓸려가는 몸짓부터 우선 멈추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영리와 성과 추구를 온전히 포기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시장주의 경쟁체제에서 뛰어든 교회의 의료, 교육기관들이 일반 의료, 교육기관과의 경쟁에서 겪는 사업 주체들의 스트레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로 겪는 심리적 갈등도 대단할 것이다. 싸우면서 닮는다고 시장주의 경제 원리에 입각한 경영 방식은 더욱 세련되게 자리 잡아갈 것이고,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에 대한 고급화, 귀족화 요구와 유혹도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큰 결단이 없이는 이런 흐름을 거슬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복음 정신을 구현하기란 불가능하리라고 본다.

교회, 자선병원이나 대안학교 외엔 의료, 교육사업에서 손 떼라

교회를 대조사회(contrast society)라 정의한 신학자 로핑크는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존재방식 곧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줄 때, 오히려 대사회적 복음적 영향력이 발휘된다면서 교회의 교회됨은 본질을 획득할 때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일반 의료, 교육사업과 차별성을 잃어버렸다는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이것은 성속이원론이 아니라 본말전도에 처한 상황을 재정립하자는 것이다.

자선병원이나 대안학교 외엔 영리와 성과를 추구하는 행태의 의료, 교육사업에서 물러서는 큰 결단을 내리라고 권고하고 싶은 이유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현장에서 구현되도록 시장과 자본이 외면하는 이들을 찾아나서는 교회 의료, 교육사업의 새로운 영역 개척도 요구된다. 모든 예언적 개혁은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 이제껏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면서 첫 마음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나라 의료, 교육사업에 교회가 공헌한 바는 지대하기만 하다. 한국전쟁 이후 잿더미로 변해 버린 땅에 교회는 병원과 학교를 곳곳에 세우면서 무너진 우리 사회를 재건하는 데 버팀목이 되었다. 우리나라 의료, 교육 수준이 선진화되는 데도 교회와 수도회를 통해 들어온 세계 각국의 인적 물적 지원이 큰 도움 됐다. 그러나 교회의 처지는 늘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 38)는 예수의 말씀 그대로여야 한다.

현재의 의료, 교육사업이 교회로서는 포기하기 힘든 대단한 메리트를 지니고 있음은 사실이다. 교회의 수익사업이라는 점을 제쳐놓고서라도 우선은 직간접 선교 효과다. 수도회로서는 성소자 확보 기능도 있다. 하지만 영리 추구 행태의 의료, 교육사업이 과연 교회에 참된 복음 선교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 수도회 고유 카리스마를 담지 못하는 사업이 수도회 영성을 수도자들에게 체화시켜줄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은 선교의 수단 이전에 교회의 존재방식이다.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은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 벳자타 연못의 예수,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70)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 새로운 도전 앞에 놓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교회는 사회 한복판에 참여해야 한다”(사목헌장 89항)고 했을 때 그 ‘한복판’은 예수께서 온 몸으로 뛰어드신 밑바닥 세상의 한복판이다. 동시에 그분이 몸소 찾아가신 가난한 이들이 살고 있는 울타리 밖 변방이다. 변방이 교회의 중심이다. 교회가 울타리 밖 변방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지 않을 때, 교회는 신원과 정체성을 상실한 채 천상의 중심도 잃을 것이다.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가 무엇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데 우선되는 것도 그러하다.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 갈수록 심화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문제, 비정규직 문제에서 나타나듯 더욱 교묘해지고 정교해지면서 민중들의 삶을 옥죄는 비인간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장치들이 산재하는 사회현실은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에도 새로운 부르심으로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의 도전 앞에서 교회의 의료, 교육사업은 복음 원칙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을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할 기회를 다시 맞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정체성 그 신원을 회복할 기회가 온 것이다.

교회, 예수의 방식을 벤치마킹하라

마침 내년이면 60주년을 맞는 대구파티마병원에서 ‘환대의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브랜드 경험 디자인’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치유자 예수님을 따라 섬김과 돌봄의 치유사도직을 계승하면서 환대와 존중의 문화로 생명존중의 전인치유를 수행하는 환자중심병원, 진료전문병원으로 거듭나겠다”는 각오다. 참으로 반가운 움직임이다. 그런데 복음적 환대(hospitality)는 관공서의 공무원들이나 백화점의 감정노동자들이 친절한 태도로 서비스 향상을 도모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무조건적 사랑을 담는 몸짓에서 비롯된다. 진정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인격과 인격의 직접 만남에서 이뤄졌듯이 환대는 결국 규모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형병원이나 대학교에서 그것은 얼마나 무리하고 힘들고 어려울 것인가. 예수의 방식을 교회가 심사숙고하는 자세로 벤치마킹할 때다.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이자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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