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성찰 - 조현진] <미래>(L’Avenir)의 출간과 좌절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9년 5-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서양사를 전공한 많은 연구자는 로베스피에르(Maximilien-François-Marie-Isadore de Robespierre)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이 권좌에 오른 때를 프랑스 혁명의 종료 시점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나폴레옹 집권 시기 이루어진 영토 확장이나 다양한 행정제도의 정비, 그리고 법전의 체계화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후 왕정복고의 기반을 다졌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나폴레옹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가톨릭교회와의 관계에도 해당한다. 가톨릭교회는 자코뱅파의 집권 시기 반그리스도교 정책에 따라 혹독한 탄압을 받았는데, 나폴레옹의 집권기인 1801년에 정교협약을 맺어 국가의 탄압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얻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정치와 종교의 밀접한 관계를 파악했던 명민한 인물이었던 나폴레옹은 계속해서 성직자가 국가에서 생활비를 받게 하거나 정부 허가 없이는 교황의 친서나 공의회의 결의문 등을 발표할 수 없게 하는 식으로 교회를 통제하려 했다. 나폴레옹이 물러난 후 부르봉 왕가가 권좌에 오른 뒤에도 교회는 국가에 점점 더 심하게 예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824년 왕좌에 오른 샤를 10세는 1830년 자신이 임명한 내각이 의원들의 반대로 임명되지 못하자, 하원을 해산하고 언론의 자유를 폐지하며 선거법을 개정해 유권자 4분의 3의 선거권을 빼앗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에 분노한 급진파와 파리 시민은 1830년 7월에 봉기하고 샤를 10세를 폐위시킨 뒤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를 왕위에 오르게 한다. 라므네(Hugues Felicité Robert de Lamennais), 라코르데르(Jean-Baptiste Henri Lacordaire) 같은 성직자가 주도해 창간한 신문 <미래>(L’Avenir)는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갔던 혁명 정국이 마무리된 시점인 1830년 10월 16일에 탄생했다.

 

7월 혁명과 <미래>의 창간

라므네 신부.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물론 7월 혁명 직후에 <미래>가 창간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과 자유’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이 신문은 샤를 10세가 칙령을 통해 제한하려고 했던 여러 기본권과 민주적 원칙의 복원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1830년 12월 7일에 실린 '<미래>의 주장들'이라는 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거기서 필자 라므네는 <미래>가 1)전면적이고 보편적인 양심의 자유와 종교적 자유, 2)교육의 자유, 3)언론의 자유, 4)결사의 자유, 5)선거권의 확대, 6)위험한 중앙집중적인 제도의 폐지를 요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런 사항들은 샤를 10세가 제한한 ‘언론의 자유’, ‘선거권의 제한’, ‘의회 해산’에 반하는 내용이었다.

<미래>는 국가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예속과 그로 인한 유착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보편적인 양심의 자유와 종교적 자유를 위해서는 “교회와 국가의 전면적 분리”가 필요하며, 이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재정적 독립과 영적 질서에서 성직자의 절대적 독립을 수반한다는 점을 명백히 밝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가 더는 국가에 소속된 교회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관리되는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공표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가톨릭교회는 <미래>의 이러한 논조를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프랑스 혁명을 겪으면서 혹독하게 탄압받다가 정교협약 이후로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교회는 이러한 주장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자유주의와 종교적 무관심론”이라는 부제가 붙은 회칙 '미라리 보스'(Mirari vos)(1832)에서 라므네를 비롯한 <미래>의 발간인들에게 1차 경고를 보낸다. 여기서 그레고리오 16세는 이 신문이 표방하는 자유주의적 사회관이 선동적이며 복음 정신에 어긋날 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에 관한 주장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레고리오 교황은 성직자가 정치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이 회칙의 반포 이후에 <미래>의 발간인들은 글을 통해서나 로마 교황청을 직접 방문해서 교황을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831년 2월 6일에 실린 '교황청에 보내는 선언문'이라는 글에 실린 ‘<미래>가 거부하는 명제들’의 목록을 보면, 라므네를 비롯한 발간인들이 얼마나 교회와 화해를 원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거기서 라므네는 교회의 영적 권력에 대해 언급하는 과정에서 “교황의 권력이 교회법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거나 “관구회의가 교황보다 더 우월하다”거나, “주교가 교황청이 승인하지 않은 포고문의 서명과 승인을 명하는 경우라도 주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미래>는 절대로 지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가 라므네 신부에게 헌정한 '리옹' 곡 도입부. (이미지 출처 = imslp.org)

교황을 설득하지 못하자 <미래>의 발행인들은 1831년 11월을 끝으로 더는 신문을 발간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 관한 교황청의 명령에 복종하기로 했다. 그러나 라므네는 정치적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지 않고, "한 신앙인의 말"(Paroles d'un croyant)이라는 책을 통해 그의 주장을 계속 전파했다. 이 책은 성서의 시편과 복음서의 우화 형식을 빌려 종교적 가르침에 어긋나는 당시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고발하고 종교적 권위를 포함한 모든 권위를 거부했다. 당시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가 라므네에게 피아노 단편곡인 '리옹'(Lyon)을 헌정할 정도로 그의 주장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런 라므네의 행보에 최후의 일격으로 응답했다. '라므네의 오류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회칙 '싱굴라리 노스'(Singulari nos, 1834)에서 교황은 라므네의 책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사악한 남용으로.... 민중을 부패시키고 모든 공적 질서의 결속을 해체하며 모든 권위를 약화시킨다”(6항)라는 이유로 라므네를 파문했다.

라므네의 파문은 <미래> 발행인들의 해산으로 이어졌다. 정신적 지도자였던 라므네가 교회에서 추방되자, 대부분 성직자였던 주요 발행인들도 그와 함께할 수 없었다. 이후 라므네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정치적 삶에 매진했으며, "민중의 책"(Le Livre du peuple, 1838), "근대의 예속"(De l'esclavage moderne, 1839) 같은 책을 저술하면서 민중의 권리와 조건, 그리고 미래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헌신하기도 했다. 그는 "근대의 예속"에서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신분제를 철폐하고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준 것처럼 보이지만, 생산수단에 대한 예속과 열악한 노동조건, 저임금을 통해 오히려 노예보다도 못한 상황에 처하게 했음을 통렬히 고발했다. 하지만 그는 물질적 조건의 개선이 도덕적 완전성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결코 사회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다. 특히 이러한 도덕적 완전성의 담지자가 개인이 아니라 사람들의 연합체, 즉 민중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혁명적’이었다. 라므네는 빈민의 한 사람으로서 빈민들의 묘지에 묻히기를 원했고,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유해는 교회에 보내지 말고 곧장 무덤으로 운반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라코르데르 주교와 노트르담 강연

죽을 때까지 교회와 불화했던 라므네와 달리 라코르데르는 교회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이후에 빈첸시오회를 창립한 프레데릭 오자남(Frédéric Ozanam) 등과 진보적인 잡지 <새로운 시대>(L’ère nouvelle, 1848)를 발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마음속에서 사회 문제와 정치 문제에 관한 관심과 고민이 떠난 적은 없었다.

라코르데르는 사회 문제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글보다 강연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그는 1835년부터 2년 동안 가톨릭 청년 신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노트르담 성당 강연에서 자유를 강조하면서, 어떻게 가톨릭 신자가 동시에 프랑스의 시민이 될 수 있는지를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강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동시에 보수적 신학자들에게서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라코르데르의 가장 유명한 강연 중 하나는 33번째 강연, 일명 '재산에 관한 강연'이다. 그는 “정의가 자연사회의 기초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정의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는 재화의 공정한 분배(distribution équitable)”라는 선언으로 그의 강연을 시작한다. 이어서 그는 하느님이 주신 재산에는 노동의 재산과 토지의 재산이 있고, 이 모두 “본질적으로 이기주의적인 것이 아니며” 가난한 이의 몫을 보장하기 위해 그런 재화의 사용을 규제하고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라코르데르는 이것을 “결핍을 채운다는 기준을 따르는 경우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자기 영토에서 난 과실에 대한 권리가 없다”라는 성서의 원칙으로 요약한다. 다시 말해, 라코르데르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대지를 준 것은 인간의 결핍 때문이며, 그런 결핍에서 적당히 벗어난 수준에 있는데도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탐욕이라고 말한다. 라코르데르는 이처럼 한 사람의 권리가 또 다른 이의 권리를 침해할 때 공동선 역시 침해되며, 그 즉시 그 사람의 권리는 중단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는 하나의 사회나 국가가 사적인 소유의 범위를 제한할 정당한 권리가 있음을 시사한다.

 

사회교리의 선구로서 <미래>의 사상

교황 레오 13세.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미래>가 폐간된 후 60여 년이 지난 1891년,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가 반포되었다. 최초의 공식적인 사회교리 문헌인 이 회칙에서 레오 13세는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극단적인 사회주의 어느 쪽도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노동자의 열악한 상황을 일종의 사회 문제로 파악했다. 그래서 적정 임금의 보장, 노동조합의 활동 보장, 노동 조건의 개선과 같은 방안을 그 대안으로 제시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래>나 라코르데르의 강연 역시 노동자(프롤레타리아)를 지지하는 사상과 자본가(부르주아)를 지지하는 사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미래>는 '새로운 사태'의 근본적 입장을 앞서 보여 준 셈이다. 또한 라므네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를 ‘근대적 예속’으로 부르면서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며 새로운 시대의 징표를 읽어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부분에서, '새로운 사태'를 떠올린다.

극단주의적 정치사상을 피하지만 가난한 이의 편에서 성서가 가르치는 정의와 자비의 원칙을 통합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도 <미래>의 동인들이 추구한 사상은 현대의 사회교리와 맞닿아 있다. 라므네가 도덕적 완성 없는 물질적 진보는 사회 문제의 해결로 이어질 수 없음을 역설하면서도, 그런 도덕적 완성은 사회 속에서, 그리고 집단의 연합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할 때 분명 그는 정의와 자비의 원칙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함께 행복할 때만 개인도 행복할 수 있다”라는 라므네의 사상은 개인선과 공동선의 조화와 일치를 말하는 사회교리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노동문제에 대한 가르침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타종교를 보는 관점 등과 관련해서도 <미래>의 입장은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을 이미 앞서 보여 주었다.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반포된 문헌 '인간 존엄성'(Dignitatis Humanae, 1965)은 그동안 단죄의 대상이었던 ‘종교의 자유’를 “계시에 근거한”(9항) 권리로 명백히 인정한다. 또한 교회가 단죄했던 ‘언론의 자유’나 ‘교육의 자유’ 등도 오늘날 사회교리에서는 기본적 권리와 가치로 인정한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새로운 사태' 차례 중 일부. (이미지 출처 =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갈무리)

이처럼 <미래> 안에는 현대 사회교리의 선구자로 평해도 무방할 정도로 혁신적이고 깊이 있는 제안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그 저자들은 유감스럽게도 사회교리의 선구자로 거론되거나 언급되는 일이 거의 없다. 이는 <미래>의 발간을 주도했던 핵심 인물인 라므네가 교회의 파문을 받고 이후에 가톨릭과 절연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나고 사회교리 역시 많이 변화되었는데도, 이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을 뿐더러 그 평가조차도 당시의 평가와 같다면 문제가 아닐까?(각주 1) 세상뿐 아니라 그 안의 교회, 교회 안의 사람 역시 시대의 징표에 따라 읽어야만 하지 않을까?

각주 1) 예를 들어, "백과사전 세트: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책은 ‘미라리 보스’ 항목을 다음처럼 설명했다. “이 잡지는 프랑스의 라므네 신부(1782-1854)와 그 일파가 발행하던 잡지로서 사회 문제와 정치 문제에서 반교회적인 교설을 퍼뜨렸다. 이 회칙에서.... 그의 자유주의 사회관이 선동적이며 복음 정신에 위배된다는 점을 지적했고, 신교 자유와 언론에 관한 그의 주장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백민관, "백과사전 세트: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2권,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7.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66564&cid=50762&categoryId=51340

조현진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서양근대철학을 전공하고 강의와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근현대 정치철학, 종교와 정치의 관계, 도덕심리학 등의 주제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