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7월 5일부터 12일까지 떼제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 정교회의 젊은 수도자들 350명이 모여서 수도생활에 대한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다. 여름 방학을 맞아 떼제로 온 3000명의 젊은이들 가운데서 형형색색의 수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정경이었다.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삶에 매혹되어 온 삶을 바쳤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교리적 차이가 대화와 나눔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 주간 동안 '교회 일치'는 참가자들에게 연구나 토론의 주제가 아니라 기도와 삶 가운데 발견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떼제의 창설자 로제 수사 탄생 100주년과 떼제공동체 설립 75년에 즈음해서 열린 이 행사에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40살 이하의 비교적 젊은 수도자들이 참석했지만 그 가운데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출신도 많았다. 수백 년이 넘은 오랜 전통의 수도회에서부터 20세기에 시작된 새로운 공동체와 수도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사람이 모였다.

▲ 떼제공동체에서의 소그룹 대화. ⓒ신한열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는 “독신 수도 성소의 현대적 의의.” 예수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의 총장을 비롯한 여러 가톨릭 수도회의 장상과 이집트, 그리스,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러시아, 벨라루스 정교회의 수도자들, 또 개신교 공동체의 원장들이 발제를 하고 이어서 질의 응답과 소그룹 토론이 있었다. 모임을 진행하면서 보니, 적지 않은 참가자들이 다른 교파의 수도자를 처음 만났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던 경우도 있었다.

개신교에도 수도 공동체가 있나요 ?

로제 수사는 “떼제는 수도 생활의 커다란 나무에 접붙여진 작은 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종교개혁 이후에 독신 수도생활이 사라진 개신교 출신 형제들이 시작한 수도회다. 정교회와 가톨릭에 유유히 이어져 온 전통에서 배우고 도움받지 않았다면 떼제의 오늘은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뜻이다.

개신교 독신 수도 공동체인 디아코니아회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시작할 때 엄청난 오해와 반발을 겪은 역사도 상기했다. 개신교회 수도회들은 초기에는 거의 모두 “복음서만으로 충분하지 '규칙'이 왜 굳이 필요한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규칙 혹은 회헌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스위스의 그랑샹(Grandchamp) 공동체는 '떼제의 규칙'으로 살아간다. 초창기부터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지만 떼제와 달리 개신교 공동체로 남았다. 하지만 예수의 작은 자매회 등 가톨릭 공동체들과도 아주 가깝게 지낸다. 떼제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독일의 스베냐와 소냐, 스웨덴의 엠블라가 이번에 그랑샹의 일원으로 와서 반갑게 다시 만났다. 또 다른 개신교 공동체인 프랑스의 포메롤(Pomeyrol)과 독일의 임스하우젠(Imshausen) 그리고 크리스투스트레거(CT) 공동체는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이 있지만 각각 떼제를 통해서 종신 서약(서원)과 규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번에 참석한 개신교 여성 수도자들은 거의 모두 베일을 썼다. 그런데 스페인과 아일랜드에서 온 전통적 가톨릭 수도자 가운데 수도복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대조적이었다. 나는 “수도복이 수도승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Ce n'est pas l'habit qui fait le moine)라는 프랑스 속담을 생각했다.

▲ 그리스 정교회의 수녀원장(왼쪽)과 개신교 수녀원 포메롤 공동체의 원장. ⓒ신한열

첫 사랑의 땅, 나의 갈릴래아는 어디?

수도회와 수도원의 장상들은 발표와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하나같이 아주 자유로운 사고와 열린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집트 콥트교회의 토마스 주교는 안토니오 성인과 사막 교부들을 언급하면서 “수도생활은 세상을 떠난 것만이 아니라, 교회 속에 들어온 세속적인 요소를 떠나서 시작한 것임”을 상기시켰다.

영화 “위대한 침묵”에 나오는 카르투시아회의 전임 총장 마르셀랑 수사와 시토의 원장 올리비에 수사는, 900년이 넘는 수도원에 살면서도 역사와 전통에 매몰되지 않고 '복음의 신선함'과 '사랑의 영원한 젊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독과 침묵 속에 사는 수도승들이 ‘변방’(변두리)으로 가도록 불림받은 수도자의 사명을 일깨워 줄 때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도들을 기다리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은 변방의 땅 갈릴래아였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새로 시작될 곳. 내가 주님을 만나고 부르심을 느꼈던 첫 사랑의 땅이자 영원히 지속될 굳건한 사랑을 약속한 그곳은 어디인가?

예수회 총장 니콜라스 신부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대륙의 전통과 문화와 종교의 지혜들도 모두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변화하는 세상 안에서 우리가 융통성과 개방성, 변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도미니코회 총장 브루노 카도레 수사는 연약함까지도 포함하여 '인간다움'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소가 되는 만큼 “인간적인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강조했다. 작은형제회 총장 마이클 페리 수사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개인적 사회적 위기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아시시의 성인이 하느님의 겸손을 강조하고 폭력의 시대에 형제애를 보여 주면서, 세상의 변두리와 소수자에게 다가간 사실을 이야기 했다.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형제애의 성사

여러 발표자들은 오늘의 세상 안에서 수도자들이 '형제애'를 살아가고 보여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뿐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의 용서도 필요하다. 화해의 성사뿐 아니라 형제애의 성사도 참으로 중요하다. 올리비에 수사는 '발씻는 성사' (세족 성사)를 다시 살리기를 제안했다. 1년에 한 번 성목요일 전례 중에 사제가 몇 사람의 발을 씻겨 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었다. 그에 따르면, 베르나르도 성인 당시에는 세족례도 성체성사와 똑같이 성사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성사론이 정교하게 다듬어지기 훨씬 이전의 일이란다. 지금 시토 수도원에서 하는 것처럼 형제들이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이 '우정의 성사'가 여러 공동체 안에서 더 자주 행해질 수 있다면.... 하고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나는 지난 해 중국에서 청년 캠프를 하면서 세족례를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더 잘 준비해서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정교회 수도자들은 서방 수도자와는 조금 다른 언어와 표현을 썼지만 기도와 삶으로 온전히 하느님의 포로가 된 내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인간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복음 선교에 대한 열정도 바로 그 내면성에서 피어나는 것이었다. 동방 교회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로 이번 모임을 더욱 깊이 있고 풍성하게 했다.

▲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대수도사제(왼쪽), 세르비아 정교회의 수도승들. ⓒ신한열

경계를 넘으면서 다리를 놓는 사람들

많은 수도자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팎에서 나라와 문화, 언어와 종교, 세대와 교육 수준 등 다양한 경계를 넘어서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경계 사이에 다리를 놓고 화해를 이루고 있는가? 아름답고 필요하지만 쉽지 않은 도전이다. 종족이나 민족들 사이에 치유되지 않고 극복되지 않은 역사의 상처에서 오는 갈등과 문제를 안고 있는 국제 공동체들도 있다. 중동에 있는 어떤 수도회의 분원에서는 함께 기도하는 것조차 어렵게 된 가슴 아픈 체험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우월감도 열등감도 넘어서 먼저 우리 자신을 복음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자신이 속한 나라와 종족과 교파가 과거에 겪었던 수모까지도 자기 안에서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현대 수도생활의 위기를 믿음의 위기라 진단하고 우리 수도자들이 일에 파묻히거나 일로 도피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모든 일에 우리 노력의 결과를 보려는 태도를 버리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을 배우기를 권했다.

교파에 관계없이 모두가 복음에 따른 삶, 형제애와 기쁨, 단순 소박한 삶에 대한 갈망을 얘기했다. 어느 누구도 성소자의 감소나 수도회의 위기를 주제로 삼지 않았다. 전쟁과 폭력의 상황, 질병과 마약과 범죄의 희생자들 바로 곁에 머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세상을 무조건 죄악시하며 탓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와 정교회 수도자들까지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과 글과 삶을 언급한 것도 특이했다. 변방에서 온 그가 교회 안에서 시작한 것이 거의 혁명과도 같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수도자들이 그것을 알아보고 이미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수도자는 결국 순례하는 사람, 길을 닦으며 길을 가는 사람이다. 제도나 규칙, 전통에 얽매여 기쁨과 자비심 형제애를 잊어서도 안 되고, 푹신한 영적인 소파에 안주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유인으로서 세상 안에서 -지금 여기- 복음의 기쁨을 살아가고 보여 주는 사람이다. 이번 모임을 끝내면서 나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나 자신의 삶을 더 단순소박하게 하면서 본질에 충실하기로, 나의 갈릴래아로 거듭 돌아가기로.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