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식의 포토에세이]

원폭2세 ‘김형률’을 아시나요?
그는 서른다섯 불꽃같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어느 청년의 이름입니다.

김형률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던 1970년, 부산에서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쌍둥이 동생은 폐렴으로 1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아서 자주 병치레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동안 제대로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을 정도로 학기마다 늘 한 달 이상씩 결석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병치레는 가난한 살림살이의 가족들에게도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년시절의 불행은 오히려 행복한 처지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급성 폐렴이 발병하여 줄곧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습니다. 그의 쌍둥이 동생을 앗아갔던 바로 그 폐렴이었습니다.

▲ 생전의 김형률 씨. ⓒ장영식

25세가 된 1995년에는 한 해 동안 폐렴으로 세 번이나 입원을 했습니다. 그때 특수검사 결과 선천적으로 면역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정확한 병명은 ‘선천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었습니다. 그를 진료했던 의사는 그의 면역수치가 거의 신생아의 면역수치와 같을 정도로 면역력이 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주치의는 선천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라는 희귀병이 생긴 원인이 원폭피해자인 어머니와 관련될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의사는 뒷날 그의 동의 없이 형률 씨의 병명으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논문의 주요 내용은 환자의 희귀병이 방사능 때문에 유전적으로 면역 체계가 교란된 결과일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후 몸이 허약한 상황임에도 전산을 전공하면서 컴퓨터와 관련된 일에 취직을 하는 등 치열한 열정으로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2001년 5월, 급성 폐렴이 재발되면서 그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이때 모든 것을 잃고 버렸지만, 그 때문에 그 자신의 정체성을 또렷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등등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병마와의 싸움은 그의 전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그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원폭 2세의 문제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퇴원하면서 원폭 문제와 반핵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특히 2001년 10월 ‘원자력의 날’을 맞아 히로시마와 야마구치를 방문하였고, 가미노세키 핵발전소 반대 운동이 격렬했던 이와이시마 섬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2002년 3월 22일, 한국청년연합회 대구지부 사무실에서 그가 원폭 2세로서 유전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이 기자회견은 한국 내의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넘어 고민 끝에 내린 그의 ‘인권선언’이었습니다. 기자회견장에는 그의 영원한 동지였던 아버지가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 후 다시 히로시마를 방문했고, “다음 세대에 대한 방사선의 영향”의 저자인 오사카대학 노무라 다이세 교수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는 일본을 방문하면서 일본 내의 원폭 2세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고, 원폭 2세에 대한 물음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 고민의 결과로 2002년 8월 6일, ‘한국 원폭2세 환우회’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카페를 개설했습니다.

▲ 백발의 아버지가 가슴에 묻은 아들의 10주기를 맞아 추모사를 하고 있다.ⓒ장영식

그러나 그의 이런 활동과 비례해서 그의 병세는 깊어갔습니다. 특히 2002년 겨울부터 2003년 말까지 그의 입원 생활은 220여 일에 가깝습니다. 부산대학병원에서 실시한 검사에서는 폐기능이 일반인의 20% 정도로 떨어졌고, 퇴원 후에도 기침과 피를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투병의 시기에 ‘환우회’를 조직화하기 위해 홀로 분투하였습니다. 그의 분투의 중심축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결과로서 생긴 원폭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었습니다. 2002년 12월, 부산대학교 박광주 교수를 중심으로 한 ‘김형률을 지원하는 모임’이 ‘한국 원폭2세 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으로 개칭하면서 결성됐습니다.

그는 히로시마 원폭투하기념일 하루 전날인 2003년 8월 5일, “원폭2세 환우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합니다. 또한 ‘한국 백혈병환우회’에서 발전된 ‘건강세상네트워크’가 포함된 8개의 시민단체로 구성된 공동대책위원회가 정식으로 결성되었습니다. 이 진정서 제출 뒤 인의협은 김형률의 건강을 위해 녹색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도록 제안하였고, 부산외국어대 이광수 교수가 대표로 있던 아시아 평화인권연대에서도 지원 활동을 담당했습니다.

2004년, 그는 2002년 이후 2년에 걸쳐 준비해온 ‘한국 원폭2세 환우회’의 첫 번째 공식 모임을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개최합니다. 당시 김형률의 건강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도 원폭2세의 건강실태 조사를 요구하고, 원폭2세 문제를 알리기 위해 강연회 등에 참석합니다.

2005년 2월, 인권위는 원폭피해자의 건강실태조사의 결과를 공식 발표합니다. 그 발표에 의하면, 원폭1세나 2세에 상관없이 원폭피해자 모두가 일반인보다 질병 발생 위험도가 극히 높다는 사실이 통계치에 의해 명확해졌습니다. 특히 원폭2세의 경우 10세 미만의 조기 사망률이 52퍼센트로 높은 비율로 나타났습니다.

원폭1세나 2세는 한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 때문에 스스로 원폭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히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5년 4월, 서울에서 ‘원폭피해자특별법 제정을 위한 의견청원 기자회견’을 개최했습니다. 그는 이 기자회견 뒤 국회를 방문해서 ‘한국 원폭피해자와 원폭2세 환우의 진상규명 및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결과 5월 18일, ‘원폭피해자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가 국회 도서관에서 열렸습니다.
 

▲ 고 김형률 씨의 어머니가 그를 기념하며 심은 나무 위로 흙을 뿌리고 있다. 어머니의 고향은 히로시마다. ⓒ장영식

그는 5월 20일, 어머니와 함께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집회‘에 참석합니다. 그는 병약한 몸으로 휴식도 없이 강행군의 여정을 감내하고 있었습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로 이동하는 나날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5일 뒤 아침이었던 5월 29일, 그는 다시 쓰러졌습니다. 부산시 동구 수정4동 수정아파트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나이 만 35살이 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의 사후 2005년 8월 4일, 민주노동당 조승수 국회의원을 대표로 ‘한국인 원자폭탄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이 발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법안은 국회에서 심의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 김형률은 병상에서 말합니다. “입원해 있으면서 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라며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작은 소망을 꼭 지키고 싶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라고. 이제 그의 소박한 꿈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 고 김형률 씨의 발자취를 밝혀주는 두 권의 책이 출간돼 있다.ⓒ장영식

▲ 한홍구 교수가 고인의 삶을 기리며 헌화를 위해 영정 앞으로 가고 있는 모습. ⓒ장영식

▲ 고 김형률 씨의 10주기를 맞아 부산민주공원 내에 그를 닮은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장영식

*이 글은 전진성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와 아오야기 준이치의 <나는 反核人權에 목숨을 걸었다>를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장영식 (라파엘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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