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2]

이번 달에 ‘2014년 한국천주교회 통계’가 발표되었다. 어김없이 십만 명 이상의 새 신자가 입교하였다. 기쁘고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교세 측면에서 ‘프란치스코 효과’를 기대하던 이들은 너무 초라한 성적표라 평가하는 듯하다. 그래서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에게 진정한 프란치스코 효과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선 교세통계에 나타난 프란치스코 효과를 살펴본다. 교세 통계에서는 두 항목을 통해 측정이 가능한데, 하나는 ‘신영세자수’와 다른 하나는 ‘연말 현재 예비자수’다.

첫째, ‘신영세자수’는 그해 새로 입교한 신자 숫자를 말하는데 작년(2014년 12월 31일 기준)에 12만 4748명이었다. 이는 2013년도 새 입교자수 11만 8130명에 비해 5.6퍼센트 증가한 수치다. 참고로 지난 15년간(2000-14) 연평균 신영세자 수는 14만 2494명이었다.

둘째, ‘연말 현재 예비자수’는 작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작년 후반기에 모집되어 올해 전반기에 영세를 받을 예정인 예비신자 숫자다. 이들은 교황 방문 이후 신청한 이들이므로 직접 영향권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014년 12월 31일 현재 이들 ‘연말 현재 예비자수’는 2만 1506명으로 전년도 2013년 12월 31일 현재 1만 9963명에 비해 7.7퍼센트 늘었다.

이 결과만 보면 교세 측면의 프란치스코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들 기억하실 텐데,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서거 때도 작년과 비슷한 사회분위기가 있었다. 당시 추모 열기로는 적어도 50만 명 이상의 새 입교자가 생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2009년 신영세자 수는 15만 6947명으로, 전년도인 2008년(14만 1484명)에 비해 10.9퍼센트 증가하는 데 그쳤다. 김 추기경 서거 다음 해인 2010년(14만 644명)에는 2008년 수준(14만 1484명)으로 다시 떨어져 김 추기경 서거 효과는 기대와 달리 1년으로 끝났다. 아마 프란치스코 효과도 마찬가지이리라.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원인을 설명한다.

첫째, 나는 이 현상이 한국 종교인들이 최근 들어 지속적으로 보여 왔던 탈(脫) 제도적 종교성을 따랐기 때문이라 본다. 탈 제도적 종교성은 신도들이 본래 소속은 유지하면서 해당 종교가 요구하는 의무들은 전혀 이행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이행하고, 채워지지 않는 욕구들만 종교의 경계를 초월해 자유롭게 충족시키려는 태도라 정의할 수 있다. 무종교인의 경우에는 아예 종교에 발을 들이지 않고 각자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태도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 갤럽의 '2014 한국인의 종교' 조사 결과들에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다수의 한국인들은 굳이 종교 소속을 바꾸거나 종교에 입문하지 않고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환호를 보냈다는 뜻인 셈이다.

둘째, 역시 한국 갤럽의 '2014 한국인의 종교'에서 나타난 결과로, 한국의 종교 시장이 안정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보고서는 30년 동안의 추이를 토대로, 종교간 이동(switching), 개종(conversion)이 줄면서 현 상태의 분할 비율(개신교, 불교, 천주교의 정립‘鼎立’ 구도)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국인의 다양한 종교적 욕구 내지 취향이 특정 종파로의 쏠림 현상을 억제하였다는 말이다. 아마 당분간은 천주교로 쏠림 현상이 약하게 이어지겠으나, 이후 전체 종교 인구는 감소의 길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

하여튼 교세 측면에서 보면 전년 대비 새 입교자 증가율이 10퍼센트가 안 된 사실은 기대 이하의 성적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넓은 시야에서 보면 프란치스코 효과는 교세에 그치지 않는다.

첫째,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이 남긴 가장 큰 족적은 ‘모범적인 종교지도자상’을 보여 준 일이다. 물론 교황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마 그가 말을 많이 하였다면 효과가 반감될 수 있었을 터. 대신 그는 있어야 할 자리, 만나야 할 사람을 잘 선택하였다. 한국 종교지도자들이 보여 주지 못하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바라 왔지만 볼 수 없었던 모습을 역설적이게도 이방인 지도자를 통해 보게 된 것이다.

실제 이웃종교인들로부터 부러움 섞인 칭찬을 들을 때 교황은 단지 교회 쇄신의 메시지만 남기고 간 게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웃 종교인들은 각자의 종교 안에서도 이런 지도자를 보길 바랐을 터이다. 무종교인들은 가톨릭의 도덕적 힘을 인식하였을 것이고. 이렇게 한국의 모든 종교들이 각자 추구해야 할 방향을 알게 되었으니 이보다 큰 효과가 어디 있겠는가?

둘째, 눈에 두드러지진 않지만 교회 안에서 많은 신자들이 그를 닮으려 노력하게 되었다는 점을 성과로 볼 수 있다. 다들 보고 싶은 면만 보아서 그렇지 다수 신자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신자 됨’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 건 분명 성과다. 어떤 신자는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있고, 어떤 신자는 씨앗에 물을 주고 있으며, 또 어떤 신자는 이미 열매를 맺고 있다. 요란하진 않지만 각자 삶의 자리에서 신자들이 교회 쇄신의 싹을 키워 가고 있다. 여기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따로 있지 않다.

▲ 2014년 12월 11일 유경촌 주교와 노사목 부위원장 정수용 신부가 당시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고공농성 중이던 씨앤앰 해고자에게 생필품과 노사목 위원들이 쓴 손편지를 전달하고 있다.ⓒ공동취재단

마지막으로, 내 신앙 여정에서 이런 교황을 만나게 된 것은 감사와 행운이다. 아마 많은 평신도 신학자들이 나처럼 생각할 터이다. 당연히 볼 수 있어야 하는 모습을 감사와 행운으로 여겨야 하는 게 서글픈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지도자의 모습을 생전에 본다는 건 기쁜 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교황 덕에 ‘옳고 좋은 일은 눈치 보지 말고 즉각 실천에 옮겨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동안은 교회가 말이 많고, 평신도 신학자들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강해 무슨 일을 하기 전 수십 번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이젠 그리하지 않을 생각이다. 식별을 통해 할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누구 눈치도 보지 않으려 한다. 남의 눈치를 보기엔 내 남은 인생이 길지 않으니 말이다.

교황이 이 정도 성과를 남겼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교세보다 중요한 게 정신인데. 그리고 이미 수많은 이들에게 저장된 좋은 기억은 언제 어떻게 어느 자리에서 현실화될지 모른다. 육안으로만 보지 말고, 영안으로도 프란치스코 효과를 평가해 보면 좋겠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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