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1]

오늘부터 매달 둘째, 넷째 화요일에 우리신학연구소 박문수 연구이사의 "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를 연재합니다. - 편집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20세기 미국 남성의 가장 큰 스트레스 원인은 ‘여성들이 자기 말을 시작한 것’이라 한다. 미국 심리학자들이 수많은 미국 남성들을 상담하고 나서 내린 결론이다. 물론 반은 농인데, 이 변인(variable)이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말은 맞다. 어떤 권위도 도전받으면 스트레스를 받으니 말이다.

전문가들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 한 전문가의 말을 들을 때는 모든 일이 명료했다가 입장이 다른 전문가의 말을 듣게 되면 이내 모호해진다. 같은 사안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가진 전문가들이 많을수록 그 집단은 더 깊은 혼란에 빠진다. 이때 우리는 단순하게 한 의견에 교조적 충성심을 보이거나, 귀찮다고 모두 거부하고 싶어 한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 다수의 신자들이 보이는 모습이다. 나는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참여하지 않는 한 어떤 변화도 의미가 없을 것인 까닭이다.

개인주의 문화권에서는 자기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열 명 가운데 두 명만 있어도 크게 기뻐한다. 다들 잘났으니 제 생각을 포기하고 남에게 동의해 주기가 그만큼 어려운 일이어서다. 반면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자기 생각에 한 사람만 동의하지 않아도 불안해한다. 90퍼센트가 찬성해도 나머지 10퍼센트가 반대하면 불안해 한다는 말이다.

민주주의를 달리 ‘controversial’이라 부르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다른 혹은 반대되는’(contro) 의견들이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발설되는’(versial)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다. 물론 이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이론, 아니면 이상이다. 그렇긴 해도 개인주의 문화권에서 이 ‘콘트로버셜리티’는 집단주의에서보다 훨씬 더 편안하게 수용된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훨씬 더 넓게 생각의 자유가 보장된다. 교회도 지금부터 이런 모습에 익숙해져야 하리라.

가톨릭 예외주의는 민주주의보다 우월한가

교회 안에는 가톨릭교회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 제법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가톨릭교회 방식이 민주주의 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기도 한다. 이들은 교회의 성스러운 방식과 세속의 방식을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일 자체를 불쾌한 일로 여긴다. 가톨릭교회 예외주의인 셈이다.

이러한 예외주의에는 일견 타당한 면이 있지만 위험 요소도 적지 않다. 현실에서 이런 예외주의를 대표하는 사례 미국을 보면 안다. 미국은 자신이 표준이기 때문에 남이 다른 기준으로 자신을 재단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전쟁도 자신이 하면 ‘정의로운 전쟁’이고, 남이 하면 ‘사탄의 장난’이다. 평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이 세상에 온갖 불화를 일삼으면서도 잘못된 줄 모른다. 강한 무력에서 나오는 오만이다.

이러한 예외주의가 종교 안에서 작동하면 더 우스운 꼴을 보게 된다. 교권을 쥔 이들은 자신이 입법권, 사법권, 집행권 모두를 쥐고 있는 줄 착각한다. 도무지 도전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 권위에 도전하는 이는 세속 삼권은 물론 종교의 성스러운 권위에 도전한 것으로 간주된다. 교권자가 자신의 권위를 신적 권위와 동일시할수록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다.

문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소소한 권위를 가진 이들도 이렇게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본당 주임신부도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는 사목회나 단체, 개인들에 대하여 이러한 예외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교회 기관에서도 수도회에서도 이런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역설적인 사실은 이런 이들일수록 자신보다 높은 권위를 견디지 못한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예외주의자가 아니다

▲ 201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교황방한위원회
교회 안에서 이런 예외주의를 자주 경험하다 보니 교회가 세상이 없어도 자신은 물론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한다. 이를 테면 새 교황이 즉위하면서 파격적 행보를 보이자 많은 이들이 그를 메시아 보듯 하는 경우다. 이런 이들은 그가 마치 이 교회를 단칼에 쇄신할 수 있을 것처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외주의자가 아니다. 그가 단칼에 가톨릭교회를 쇄신할 수 있으려면 교회역사상 가장 강력한 교황권을 손에 쥐어야 한다.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의 금력, 인력도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교회구성원들이 그의 생각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야 한다.

우리가 현 교황을 사랑하고 그의 노선을 잘 따르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 교황은 로마 교구의 중심성을 탈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무력함을 통해 교회를 쇄신하고 싶어 한다. 여러 생각들이 충돌하는 시끄러운 교회가 되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 속의 일치를 실현하고 싶어 한다. 아마도 이런 교회가 될수록 제도는 약화되겠으나, 교황의 도덕적 권위는 더욱 강화될 터이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지 반세기 만에 공의회 정신을 구현할 적임자 교황을 만났다. 우연이 아니다. 공의회의 결정을 되돌리려는 시도들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다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쇄신의 움직임을 이어 나간 결과다. 지금의 결과가 보잘 것 없어도, 쇄신은 늘 다수의 오랜 기다림과 인내와 노력의 산물이다.

공의회가 그리던 교회상, 현 교황이 바라는 교회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다음 교황이 그가 추구하던 노선을 뒤집을 수 있다. 그 뒤에도 현 교황의 노선을 뒤집으려는 시도가 계속될 수 있다. 그러니 당장 마음에 드는 교황이 왔다 해서 그의 교권을 강화하거나 또는 지나칠 정도로 열광하는 일도 금물이다.

가톨릭 예외주의를 포기하고 겸손하게 성찰해야

현 교황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우리는 가톨릭교회 예외주의를 포기하고 겸손하게 세속의 기준으로도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도 세속에 떳떳할 수 있으면 교회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교황의 입만 바라보지 말고 각자가 속한 자리에서 부터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 쇄신은 불가하다고 비관적으로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나는 ‘변화가 불가능하면 우리의 신앙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작은 변화도 누군가 변화를 만들려 노력한 결과라고 보면, 더 이상 변화를 누구한테 일방적으로 미루는 태도는 금물이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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