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인 1865년 3월 17일, 베르나르 프티잔 신부는 성당 문 밖에 일본인 15명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교회는 나가사키에 사는 유럽인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새로 지은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세 여자는 무릎을 꿇고 프티잔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우리들 모두의 마음은 당신네들과 같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일본에서는 천주교 금지령이 실행되고 있었고, 두 세기가 넘게 박해가 이어졌음에도 일본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들은 “가쿠레 기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이라 했고, 자신들의 신앙을 대를 이어 비밀로 전달하고 있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나가사키에 있는 오우라 성당에 찾아옴으로써 이 소문은 사실로 증명됐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일본에서는 마지막 박해의 불꽃이 일어난다.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는 1587년에 불법이 됐고 10년 뒤에 나가사키에서 26명이 처형되면서 박해가 시작됐다. 가장 잔인하고 체계적인 그리스도인 박해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복음화는 1549년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오면서 시작됐는데, 당시 대개의 선교사업이 그랬던 것처럼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목표였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선교활동을 일종의 구조 작전으로 생각했다.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 영혼들을 구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중 하나는, 교리교육에는 별 중점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는 남미나 필리핀에 이런 선교 스타일의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곳에는 교회에 많은 신자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늘 깊은 곳까지 다가가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고, 때로는 강압으로 그랬는데, 신앙에 대해서는 아주 기초적인 이해밖에 없었다. 그들은 약간의 기도문을 알았는데 그나마 라틴어인 경우가 많았다. 성인과 성모에 대한 몇 가지 공경도 익혔는데, 이런 성인과 성모도 현지의 토착 신들과 혼합되곤 했다.

일본에서는 일부 신자들은 신앙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고 평신도가 지도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가톨릭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야 했을 때 몇몇 신자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좀 더 잘 자신의 신앙을 기억하고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세기 반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조상에게 가르쳤던 교리들을 잊어 먹었다. 그들은 성경이나 교리서가 없었다. 그런 책은 천주교 신자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리시탄은 글을 모르는 문맹이었다. 그들은 남몰래 모여 절의 불상 안에 숨겨 놓은 헝겊 뭉치에 써 놓은 기도문을 외웠다. 여기에는 조상들이 전해 준 성상이나 십자고상, 메달 등도 있었다. 이들의 종교는 불교와 신도, 그리고 절반쯤 기억하는 가톨릭 신앙의 혼합물이 되었다.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이 공동체의 전승을 가르쳤다. 마을 원로들이 예배를 이끌었다. 발견되면 죽는 일이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에서 가톨릭교의 거의 모든 신학이 사라졌음에도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감은 유지했다. 조상과 서로에 대한 충성심이 이들을 묶어 주었다.

(일본이 개항하고 다시 외국인을 받아들여) 프티잔 신부가 일본에 와서 이들 기리시탄을 만났을 때, 이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신앙 생활과 믿음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너무나 달라져 있어서 이들을 도저히 일종의 그리스도인이라고도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다시 들어온 선교사들의) 가톨릭교회는 이 기리시탄들에게 조상들의 전통을 포기하고 교회에 새로 입교할 것을 권유했다. 약 3만 명의 가쿠레 기리시탄 가운데 절반이 그렇게 했다. 나머지는 수백 년에 걸친 박해에도 지켜 온 그 신앙을 포기할 것을 거부했다. 자신들의 신앙과 정통 그리스도교 사이의 차이가 너무 커서 원래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도대체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톨릭신자가 된 기리시탄들을 위해, 선교사들은 그들의 마을에 교회들을 지었고 그들의 조상이 원래 믿었던 실제 신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런 가쿠레 기리시탄의 후손들은 나가사키 가톨릭교회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선조들의 신앙이 진정한 가톨릭에서 멀리 벗어났음에도, 어쨌거나 박해를 이겨내고 신앙에 충실했던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이런 박해의 역사 때문에, 이들의 가톨릭 신앙은 일본 다른 지역 신자들과는 강조점이 좀 다르다. 요즘에도 이들의 신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전통적이며, 신앙을 지키고 다음 세대에 넘겨 주는 것을 강조한다. 조상들이 남긴 유산이다.

그러나, 가쿠레 기리시탄으로부터 내려온 이 교회도 근래에는 변했다. 신앙을 지키는 교회에서 신앙을 나누는 교회로 변하고 있다. 적어도 신앙의 일부 기억이라도 지켰던 조상들을 존경하지만 오늘날의 선교를 위해 그 신앙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데 헌신하고 있다. 이들은 숨지 않고 나온다.

일본교회뿐 아니라 보편교회는 이들 나가사키 가톨릭 신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신앙 나누기보다 “신앙 유지”에 우선을 두었던 수십 년의 시기(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 시기)를 거쳐 나왔다. 우리는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보호된, 폐쇄된 선민 공동체가 되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에게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선포는 단순히 한 교황 문서의 이름이 아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정의다. 이제 우리는 나가사키의 가톨릭 신자들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죄보다 강하고 박해보다 강하며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이제는 서로에 대해 충실하고 주님에게 충실하면서 숨은 곳에서 나와서 열린 곳으로 나갈 때다.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회
<아시아가톨릭뉴스>의 발행인이며,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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