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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용서의 동굴[성 프란치스코의 길, 가난의 길 - 16]
황인수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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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18  12: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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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조 부스토네

리에티에서 버스를 탔다. 코트랄(Cotral)이라는 푸른색의 시외 노선 버스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버스를 타면서 기사 분에게 “포조 부스토네 가는데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몰라요” 그랬더니 “걱정 말아요. 우리가 챙겨 줄 테니!” 하는 소리가 이구동성으로 울린다. 앞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합창이다. 친절하고 인간미 넘치는 여기 사람들 모습에 나무 수사와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친해지면 시쳇말로 ‘간이라도 빼 줄 것 같이’ 다정해지는데 우리 모습과도 많이 닮아서인가, 이런 때에는 유쾌한 정이 느껴진다. 물론 가끔 과하다 싶은 때도 있지만. 우리가 탄 버스에도 운전기사 위쪽에 “기사에게 말 걸지 마시오”라는 말이 적혀 있다. 세상에나! 아마 기사가 앞자리 승객과 말을 나누느라 정신을 팔다가 교통사고라도 났던 게다.

   
▲ 버스 기사 자리 위에 ‘기사에게 말 걸지 마시오’라고 써 붙여 놓았다.ⓒ김선명

우리가 가는 곳은 포조 부스토네(Poggio Bustone). 프란치스코 성인이 평화를 선포하기 시작한 선교의 출발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그런 연유로 ‘빛과 평화의 성지’라 불리기도 하고 성인이 자기 죄에 대한 용서에 확신을 얻은 곳이기에 용서의 장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루는 그에게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놀라면서 주께 간구하기를 자기 자신 및 형제들이 살아갈 길을 보여 주시기를 소원하였다. 그는 자주 그랬듯이 기도할 곳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온 세상의 주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머물렀다.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비참하게 보낸 지난 여러 해를 생각하고 마음 아파하였다(토마스 첼라노, ‘제 1생애’, 26에서).

여기 성인의 일화에 나오는 ‘죄’라는 말에 부끄러움이 떠오른다. 죄의 결과로 벌을 받아 어디 갇히거나 매를 맞거나 하는 그런 죄 말고 자기의 존재에 대한 감정 같은 것 말이다. 절대자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분 앞에서 합당하지 못하다는 생각, 자신이 맞갖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가장 근본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다. 아담과 하와가 문득 하느님의 시선을 느끼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몸을 가린 것처럼. 그런 면에서 부끄러움은 존재에 대한 감정이고 자신이 깃들어 있는 몸에 대한 감정이 아닐까. 하느님께 다가가기에는 너무 무거운 나의 몸에 대한 감정 같은 것, 정신을 배반하게 하는 몸에 대한 감정 같은 것 말이다.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회심 초기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다미아노 성당을 밝힐 등잔의 기름을 구걸하러 다니던 성인이 옛 친구들이 모여 있는 집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 발길을 돌렸다가 다시 몸을 돌려 그들에게 제 속에 일던 감정을 고백하고 기름을 구걸하여 얻었다는 얘기다.

   
▲ 포조 부스토네 성 야고보성당 입구.ⓒ김선명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은 자기 안에 머물고 있었다는 뜻이다. 제 속에서 일어난 인간적인 일을 고백하고 구걸을 계속했다는 것은 자기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회심 이후에도 성인의 마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버스는 야고보 성당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경사가 상당히 급한 중턱에 포조 부스토네 마을이 있고 그 제일 위쪽에 성 야고보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은 성 야고보 수도원과 붙어 있다. 우리는 먼저 성인이 기도했다는 위쪽의 동굴에 오르기로 했다. 포조 부스토네의 산 위 동굴에서 자기 죄를 아파하며 기도하던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더니 차츰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떤 즐거움과 대단히 큰 감미로움이 마음 깊은 곳에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초연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마음 안에 죄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억누르던 어둠이 밀려남에 따라서 그의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은총에로 다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보이는 것이었다.(토마스 첼라노, ‘제 1생애’, 26에서)

내 존재의 이유가 하느님이라면... 부끄러움에서 벗어난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자신에게서 구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벗어날 길이 없다. 아침에도 한낮에도 저녁에도 문득 문득 자신의 한계를 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다가도 말꼬리를 흐릴 때가 있을 것이고 행동에도 자신 없는 모습을 숨길 수가 없으리라. 그러나 존재의 이유를 하느님에게서 구하는 사람은 다를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여기에서부터 세상에 나아가 선포를 시작했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연약하고 가난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있다. 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다.’라는 깨달음이 그를 일어나 세상으로 나가게 했다는 뜻이 아닐까.

   
▲ 포조 부스토네 산 위의 동굴 내부(왼쪽), 종을 치는 나무 수사.ⓒ김선명

산 위 동굴에 들어서자 누가 붙여 놓은 글귀가 눈에 뜨인다.

이 ‘거룩한 동굴’에서 성 프란치스코 사부께서는 긴 통회와 기도 끝에 첫째, 세상에서 행할 사도적 사명에 대한 확인을 받았고 둘째, 그의 죄에 대한 용서를 얻었으며 셋째, 그의 형제들이 크게 불어나리라는 계시를 받았다.

오 경건한 마음으로 이 거룩한 동굴을 찾아온 순례자여, 하느님의 자비를 얻으리라는 희망을 맘속에 품지 않았거든 이곳을 떠나지 말라.

우리는 올라오기 전에 들은 대로 밖에 나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함께 오지 못한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울리는 종이다. 우리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고. 우리 또한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부름 받은 자비를 입은 사람들이라고.

   
▲ 동굴 내부 제대에 순례자들이 가져다 놓은 기념물.ⓒ김선명

 

 

 
 

황인수 신부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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