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준의 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11]

우리는 이렇게 배웠다. 230년 전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온 동기는 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이었다고. 당대의 일급 지식인들이 외부의 도움 없이 책을 읽고 스스로 깨달아 신자가 되었다. 그들은 천주학의 진리를 널리 퍼뜨리고 싶었지만, 곧 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러자 양반 출신들은 점차 일탈했고, 천주학은 일종의 ‘종교운동’이 되어 민중들과 여인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대체로 이런 설명은 한국 교회의 일반적 인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뭔가 빠졌다는 느낌이 진하다.

‘지적 호기심’이 속한 맥락

우선 천주교가 수입될 시기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누락되었다. 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이 수입의 동기라고 하는데, 그 지적 호기심을 품었던 학자들은 당대의 진취적인 실학자 그룹에 속했다. 필자 같은 신학자에게 조선조 후기의 당파를 말끔히 정리하는 일은 늘 어렵다. 다만 크게 가르자면, 서양의 선진 기술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쪽이었다.

성리학 일변도의 사회에서 한계를 느꼈던 그들의 시도는 무참히 꺾였다. 천주학을 짓밟으면 외세와 화친하려는 세력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다는 수구파의 전략은 좁은 땅에서 효과적이었다. 서양과의 제한적 교류를 성사시켜 실리를 얻고 힘을 기르던 동시대 일본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아쉬운 역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훗날 일본에 삼십 년 넘게 식민지로 살 것이라고 이때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필자는 ‘지적 호기심’의 역사적 맥락을 지적하고 싶다. 천주학을 받아들인 학자들이 속했던 집단의 이런 사회적 맥락이 한국 평신도의 필수적 교양 지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어떤 편을 들던 사람들, 친구와 적이 분명했던 사람들, 돌파구를 찾던 사람들이 열망하던 ‘외부의 지식’ 가운데 서학책이 있었다. 책의 백성과 책은 그런 맥락에서 마주쳤다.

‘진보적 성격’이라는 교회 밖의 관찰

최근 가톨릭교회 밖에서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오히려 조선조 후기 천주교 운동의 진보적 성격을 지적했다. 서울대 규장각 조교수인 김시덕은 <주간 조선>(!)에 연재하는 글에서 윤지충이 신주를 불태운 사건을 해석하며, 신앙상의 충돌을 넘는, “혁명 사상”이라고 평가했다.

“이 사건에 대해 한국 학계 일각에서는 신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유교와 십자가를 숭앙하는 기독교 간의 신앙상의 충돌이라는 해석이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18세기 말 조선의 기독교는 단순히 유교를 대체하는 신앙으로서가 아닌,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존 질서를 전복시키는 혁명 사상으로서 기능했다.” (김시덕, “한반도와 유라시아 동해안 500년사", <주간조선> 2323호, 2014.09.15).

그는 백정이었던 황일광 시몬, 문초 받던 중 “세상이 마칠 때 모든 나라가 없어진 다음에는 양반과 서민, 임금과 백성의 구별이 없이 모든 연령층의 모든 사람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천주 성자 앞에 모일 것”이라고 말한 박취득 라우렌시오, “한번 여기 들어오면 양반과 상민의 차이란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답한 신태보 베드로 등의 예를 들며, “그 평등주의가 조선의 지배계급에는 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정치적 사태로 받아들여진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서울대 국문과 정병설 교수는 최근 화제가 된 ‘죽음을 넘어서 - 순교자 이순이의 옥중편지’(민음사, 2014)에서 당시 ‘천주학 수입과 박해’의 사회적 맥락을 잘 지적했다. 조금 길지만 문단 전체를 인용한다.
 

▲ 8월 16일 124위 시복식 미사에서 강론하는 프란치스코 교황.ⓒ교황방한위원회
“신유박해를 거의 일단락 지은 다음 전국에 반포한 토역반교문(‘순조실록’ 1801.12.22)에서 조선 정부는 천주교도의 성분을 이렇게 요약했다. ‘폐족, 서얼 등 뜻을 잃고 국가를 원망하는 무리를 규합하여, 잘나가는 세력에 붙어 무리를 키우고, 시정(市井)의 거간꾼과 농사꾼, 여자까지 불러 모았다.’ 하층민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는 소외집단이니 현실 모순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겠지만, 양반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폐족과 서얼이다. 양반의 서얼이야 이미 양반 축에 끼지도 못하지만, 폐족은 그래도 한때는 양반이었다. 이런 자들에게 기존의 이념과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신흥 사상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과 무리를 이루었다. 자신은 비록 기성의 정치권력 속에 편입되어 있지만, 기득권을 가진 핵심 세력과는 어느 정도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있는 지식인들이다. 대표적 인물로 정약용을 들 수 있다. 천주교에는 하느님 아래의 모든 사람이 같다는 평등 관념이 있다. 소외층과 비판적인 지식인이 천주교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천주교는 새로운 교리일 뿐만 아니라 진보적 사상이었다.” (167-168쪽)

천주교적 정체성이 없는 두 학자의 독립적 연구는 방법론도 다르고 -역사적(김시덕), 문학적(정병설)- 연구 대상도 다르지만, 공통된 관찰과 해석을 공유한다. 조선조 후기의 맥락에서 천주교는 새로운 종교일 뿐만 아니라 분명 진보적 성격을 지녔다. 안타깝게도 이 점이 가톨릭교회에서 널리 공유되지도, 성찰되지도 못하고 있다.

‘세상에 도전받는’ DNA

올해 방한하신 교종 프란치스코는 초기 천주학 운동의 이런 성격을 더욱 신학적으로 성찰할 길을 열어 주신다. 교종은 이번에 시복되신 분들을 ‘세상에 도전받은’ 사람이라고 설명하시고,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 세속적 가치와 타협하지 말 것을 권유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광화문 124위 시복식 강론)

세속적 가치와 극심한 마찰을 빚은 것이 순교였다. 그리고 그런 순교의 체험은 한국 교회의 몸에 DNA가 되어 물려 내려온다. 1970-80년대, 고 김수환 추기경 등은 정권이 탄압해 오면, ‘순교로 맞설 것’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남기셨다. 그렇다. 순교는 이 땅에서 본디 하느님을 위해, 세상에 맞서는 일이었고, 초기부터 전승된 것이었다. 우리 역사의 맥락에서 형성되고 전승된 것이다.

나아가 교종은 사도행전에 드러난 초대 교회 역사에서 이루어진 이상향이 우리나라 천주교 전래 시기에 이미 이루어졌음을 상기시켜 주셨다. 기근과 폭정이 심하던 조선조 말엽, 교우촌에는 가난한 사람도, 굶어 죽는 사람도 없었다. 하느님 나라를 이룬 초대 한국 교회의 선조들은 예수님께 직접 배운 사도들을 닮으셨다. 하지만 우리가 바로 세속적 가치에 맞서 복음적 이상향을 구현한 자들의 직계 후손이란 점도 우리 교회에서 널리 공유되는 상식이 아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의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광화문 124위 시복식 강론).

이상만 해도, 한국 가톨릭 신자의 교양으로 다듬고 추가해야 할 지식이 몇 가지된다. 우선 신앙이 수입될 당시의 맥락과 성격이 교회 내에서 상식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당대의 세속적 가치와 긴장 관계에 있고, 때로 세속 권력에 맞서 갈등을 빚는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된다. 복음 자체가 그렇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주님의 가치를 따른 순교자의 후손들이다. 이윤의 극대화나 무한경쟁의 수용 등 세속의 가치를 내면화하는 일은 박해자가 원하던 것이다. (계속)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평신도 신학자’의 자리를 기쁘게 모색하는 두 아이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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