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 9]

지난 3회에 거쳐 우리는 한병철의 성찰을 교회에 적용해 보았다. 우선 그의 성찰 가운데 교회를 돌아볼 만한 것을 추려보았고(6회), 긍정과 열정의 과잉이 자신을 소진해 ‘피로한 교회’와 ‘냉담이라는 충전’을 생산하는 과정도 살펴보았다(7회). 그리고 ‘바쁜 신앙의 빈틈없는 내면’을 낳는 교리교육보다 ‘큰 의심과 큰 깨달음’을 주는 교양 교육이 더 필요할 것이라는(8회) 생각도 해 보았다. 이제 이번 호에서는 그 마무리로 몇 가지 자투리 이야기를 첨가하겠다.

꽉 막혀서 뻣뻣이 굳다

‘경색’(梗塞)은 소통하지 못하고 꽉 막힌다는 뜻이다. 그래서 결국 뻣뻣이 굳는다. 무한긍정으로 내면이 가득 차면, 빈자리가 없고, 결국 남을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몸과 마음이 뻣뻣이 굳는다. 한병철의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66쪽)는 통찰은, 그래서 몸과 마음이 꽉 막히고 뻣뻣한 현대인의 상태를 잘 표현한다고 보인다.

그런데 ‘뻣뻣이 굳는다’는 성경의 언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질책하실 때,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하셨다(탈출 32,8; 신명 9,6.13). 목이 뻣뻣한 백성은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난 백성이요, 겸손하지도 순종하지도 않는 백성이다. 하느님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가장 중요한 계명을 어겼으므로 더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자격이 없음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그 반대말은 ‘하느님 백성’이다. 이 말은 신약시대에도 쓰였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다(사도 7,51).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과 잘 소통하는 백성이다.

구약시대의 목이 뻣뻣한 백성과 현대의 경색된 영혼은 공통점이 있다. 내면이 ‘우상’으로 꽉 차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 된 이유는 하느님을 버리고, 하느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우상을 놓았기 때문이다. 마음속을 ‘긍정과 성과의 우상’으로 꽉 채우고 결국 경색되어 뻣뻣하게 굳어 버린 현대인의 내면도 마찬가지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런 사람들의 내면에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복음의 기쁨』2항)고 지적하셨다.

양의 냄새, 타인의 냄새

그런 꽉 막혀 뻣뻣한 내면을 극복하려면, 소통을 위한 공간, 곧 타인을 위한 자리를 내야 한다. 긍정의 무한 수용을 중지하고, 잠시 곁을 돌아보아야 한다.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타자를 수용하는 일, 가난한 이에 불쌍한 마음을 지니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구하고 결국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교종은 우리가 ‘타인의 일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권유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유명한 ‘양들의 냄새’를 풍겨야 한다는 말씀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생활에 뛰어들어 그들과 거리를 좁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인간의 삶을 끌어안고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집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자들은 ‘양들의 냄새’를 풍기고, 양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복음의 기쁨』24항)

‘양들의 냄새’는 대개 사제를 향한 말씀으로 사용되지만 교종의 말을 잘 새겨보면 이는 하느님 백성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복음의 기쁨』이 본디 하느님 백성 전체를 향한 권고이고 교종은 하느님 백성 전체를 향해 이런 말씀을 자주 쓰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는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자 하시는 착한 목자의 눈으로 접근해야 합니다.”(24항)고도 말씀하셨는데, 이 또한 하느님 백성 전체를 향한 말씀이다. 사실 ‘착한 목자의 눈’이나 ‘양들의 냄새’는 성품성사에 관련 없이, 하느님 백성 모두가 지니고 풍길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말을 사제나 제도 교회를 질책하는 맥락에서만 쓰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는 맥락으로 확산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다름’을 더욱 많이 수용해야

▲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장면. 사진출처/ASSISI TV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신앙은 본디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타인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깊이 공감할 때 타인에 대한 사랑이 가능하다. 교종이 언급하신 ‘착한 목자의 눈’이나 ‘양들의 냄새’도 복음의 핵심에 이미 들어 있는 내용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더 많이, 더 깊이 타자를 수용하는 길에서 발전했다. 그리스도교는 고대 근동 세계에서 자라났지만, 곧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했고, 유럽 토착 문화를 수용했다. 그 결과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틀이 잡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결국 근대성을 수용한 것이 아닌가? ‘해방’은 이제 어엿한 신학의 주제로 구약학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자리 잡았다. 그래서 현대의 신학자들은 아직 우리에게 낯선 요소를 수용할 방법을 찾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다른 종교의 요소를 더욱 수용할 것이고, 여성, 환경, 사회, 인종 등등의 많은 주제를 복음의 기준으로 더 깊이 수용할 길을 찾고 있다. 이런 요소들은 이전 시대에는 신학의 일부로 전혀 생각되지 않던 것들이다. 하지만 현재는 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마도 미래 신학에서는 신학과 더욱 깊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종의 『복음의 기쁨』은 ‘경제’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는데, 이 역시 이런 긴 ‘수용의 역사’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인간 존엄성, 평등, 인권, 종교의 자유 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이제 비교적 잘 받아들여진다. 그런 영역이 ‘교회의 발언 영역’으로 인정되는 것도 꽤 오래 걸렸지만, 이제는 교회가 그런 영역에서 비판하고 항의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런데 교종은 이제 새로운 영역, 곧 경제 정책, 경제적 배척과 가난한 사람의 사회적 통합 등의 주제를 제시했다. 이제 경제라는 ‘새로운 다름’을 위한 자리를 내기 위해서 진지하게 실천하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타자를 수용한 순교자들

타자의 수용이란 면에서 한국의 순교자들도 돌아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유교 문화권에서 천주학을 받아들인 그들이야말로 타자를 깊이 수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새로운 인간형’을(정병설) 우리 민족에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그런 타자를 수용하길 거부한 조선조는 망했고, 그 이념인 유교는 사회적 영향력을 현저하게 잃어버렸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종은 한반도의 심장부인 광화문에서 124위의 시복식을 주재하셨다. ‘신주를 불사르던’ 집단, ‘아비도 임금도 없는’(無父無君) 무리, 그래서 가장 극악한 패륜아요 이단아였던 천주학쟁이들이 광화문 한복판에서 시복되는 의미는 참으로 크다. 타자를 전격적으로 수용한 그들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양서를 허하라

이런 맥락에서, 가톨릭계 서점에서 양서(良書)를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앞서 말했듯 교회 생활에서도 긍정의 과잉은 소진과 냉담을 낳는다. 교리교육보다는 평신도 교양과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 타자를 수용하는 일, 변방으로 나가는 일에 도움이 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가톨릭계 서점에서 교회 인가를 받은 책만 다룰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양서를 적극 수용했으면 한다. 교리의 깊이, 영성의 깊이로 초대하는 책도 필요하지만 넓은 교양과 깨달음을 주는 일도 그만큼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톨릭계 서점에서 일종의 따분함과 숨막힘을 동시에 경험할 때가 있는데 교회 인가를 받은 신앙 서적 일색으로 채워져 있을 때 더욱 그렇다. 긍정 일색의 과잉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신천지’ 류나 인가 받지 않은 사적 계시 등의 내용을 걸러내는 일은 이루어져야 할 것이지만 훌륭한 철학서, 교양서, 인문서 등을 선별하여 신자들에게 깊은 타자의 생각을 접할 기회로 안내하면 좋겠다는 느낌이다. 가톨릭계 서점이 신자들을 교리 뿐 아니라 넓은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평신도 신학자’의 자리를 기쁘게 모색하는 두 아이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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