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 8]

<한병철의 통찰에 기대어 교회를 돌아보는 작업이 의외로 길어지고 있다. 글을 쓰며 계속해서 생각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번 글도 역시 하느님 백성의 일부에 해당할 것이다. 바쁜 신앙생활 속에서도 의미를 놓치지 않는 일부 ‘엘리트 신앙인’들에게는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1. ‘무한 긍정’의 폭력
한병철이 말하듯, ‘긍정성의 과잉’이 가져온 폭력은 완전히 다르다. 아무도 박탈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내가 소유한 것을 빼앗는 사람도, 나를 배제하는 타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의 내면을 긍정으로 포화시킨 주체는 타인이 아니다. 나의 내면에 다른 것이 전혀 들어갈 수 없게 학업, 창업, 승진 등의 ‘성공의 긍정 신화’로 나를 꽉 채우고 살게 만든 사람은 나다. 어느새 스스로 그렇게 세뇌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온갖 자기 계발서를 보자. ‘실제로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입한다. 그래서 그런 책을 읽고 나서 성공한 사람보다는, 그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미쳐야 성공한다’는 식의 주장은 이런 무한 긍정을 극단으로 확대한다. 하지만 이런 정신 상태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사는 현대인은 성공을 긍정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서, 일종의 자기착취의 무한궤도에서 산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화되는 이 궤도에서 아무도 내릴 수 없고, 스스로 ‘바쁨’을 멈출 수 없다. 결국 완전히 타 버리는(burn-out) ‘소진 증후군’이 발생한다. 스스로 무한 긍정하고, 스스로 바쁘기에 이런 내면을 나누기는 힘들다. 소진을 겪는 사람의 내면은 우울하고 외롭다.

2. 바쁜 생활, 피곤한 내면
이렇게 긍정의 과잉으로 꽉 찬 현대인의 내면은 그 자체로 건강하지도 않고 종교적 깨우침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필자는 이 점이 특히 안타깝다. 그런 내면에는 여유도 없고 의심과 비판적 인식이나 타인에 대한 관심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 타인을 향한 사랑의 시선이 피어날 수 없다. 도움을 요청하는 이웃을 측은한 마음으로 공감할 수 없다. 이런 내면을 지닌 이들은 가난한 사람을 그냥 지나친다.

현대인은 교회에서도 비슷하게 산다. 일종의 ‘긍정의 과잉 현상’은 성당에서도 볼 수 있다. 복음의 메시지를 깊이 믿는 일과 사목자의 지시사항을 무한히 긍정하는 일이 동의어로 생각된다. 사목자에 대한 무한 긍정은 믿음의 훌륭한 표지로 생각된다. 레지오든 소공동체든 기타 단체일이든 시간을 쪼개어 많은 일을 맡는 신자는 그만큼 믿음이 크다고 인정되지 않는가. 성당에서 성경의 깨달음을 나누고 예수의 비유에 탄복하는 시간은 적다. 그 대신 많게는 10개가 넘는 일을 맡아야 한다. 그래서 ‘바쁜 신앙인’이 탄생하고, 일부는 신앙생활에서 지친다. 결국 적당한 기회를 봐서 쉬기도 한다. 주기적으로 열탕과 냉탕을 오고 가는 사람도 있다. 지난 글에서 말한 대로 교회 일이 이렇게 힘들고 바쁘게 되면, 냉담이 일종의 휴식이 될 것이다.

3. 퇴근하지 않는 비서의 상태
현대인이 이렇게 된 일부 원인은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무한 긍정’에 있다. 성과 사회에서 사는 바쁜 현대인은 아침부터 밤까지 쉴 틈 없이 움직인다. 그들은 24시간 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퇴근길에도 자신에게 부과되는 업무에 즉각적으로 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마치 보스의 상태에 따라 즉각 반응해야 하는 비서처럼 살아야 한다. 대기상태의 내면은 ‘영원히 퇴근하지 않는 비서의 상태’ 또는 ‘종의 상태’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가게를 지키는 자영업자는 말할 필요도 없다.

늘 대기하는 비서는 쉬는 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쉬는 시간은 파편적이고 단절적이다. 손님이 언제 가게에 들어올지, 어떤 문의 전화가 올지, ‘보스의 오더’가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시도 때도 없이 카톡이나 메시지나 전화나 이메일로 업무와 관련된 사항이 내게 전달되는 순간 달콤한 여가는 무조건 중단된다(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여가는 없다).

이렇게 잠깐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고 짧은 시간에 충분한 자극을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지하철이나 시내 곳곳에서 휴대폰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라. 게임 중간에 전화나 카톡이 오면 매우 자연스럽게 대응하고 다시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빌딩숲에서 몇 분간 담배 피우는 직장인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커피와 담배가 그들이 하루에서 누리는 휴식의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회식은 공공연히 업무의 연장 아닌가). 그들은 몇 분 안에 적당한 자극을 얻고 일로 복귀해야 한다.

쉬는 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비서는 독서를 할 수 없다. 책을 읽는 자는 ‘독서의 주인’이다. 타인은 독서자를 위해 침묵해야 하고 잠시 기다려 줘야 한다. 이렇게 독서란 책에 빠져들 수 있는 여유와 정신의 힘이 필요한 일이다. 책에 정신이 팔린 사람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다. ‘잠깐만요, 이 대목만 읽구요’라는 대답을 듣기 십상이다. 하지만 비서는 보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비서는 보스가 말하면 책을 덮어야 한다. 보스 때문에 자주 책을 덮다보면 책읽기의 흥미가 떨어진다. 그리고 휴대폰 게임에 몰두하거나 담배 한 대를 빨리 피우고 올 것이다.

4. 늘 대기상태의 신앙인들
필자는 가톨릭 신앙인들이 곧 평신도, 수도자, 사제를 막론하고 이런 대기상태 또는 비서의 상태로 사는 모습을 본다. 평신도는 본당 신부님이나 단체의 임원들이 시키는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상태에서 성당 생활을 한다. 사제나 수도자는 장상에 그런 상태를 유지한다. 신부님이 한 마디만 하면 평신도는 즉각 움직이고 장상이 한 마디 하면 성직자와 수도자도 즉각 실행에 옮긴다. 퇴근하지 않는 일부 대기업 사원처럼 일부는 하루 종일 윗분들과 업무를 상의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깊이 기도나 영성에 빠지기도 힘들고 독서를 하기도 힘들다. 신학서적의 판매실적을 굳이 예로 들지 않아도 실제로 바쁜 신앙인들이 충분한 독서를 하는 것 같지 않다. 늘 윗분들의 명령에 대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당에서 기도나 영성에 푹 빠져 있기가 힘들다. 종교적 깨달음을 서로 자유롭게 나눌 기회는 모임 시간의 ‘느낌 발표’ 정도로 축소된다. 나머지 시간은 늘 대기해야 한다. 대기하는 신앙인이 많을수록 교회 조직의 중앙 집중적 구조는 더욱 강화되고 교회는 군대처럼 된다. 변방과 야전의 상황보다 중앙의 의지가 더욱 중요해 진다. 대기하는 백성은 권력자에게 큰 유혹이다.

비록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이런 무한 긍정의 상태는 진보적 성향의 단체도 공유한다. 정의 평화 운동에 참여하는 각종 단체의 활동가들을 보면 그 단체가 추구하는 가치에 무한 긍정을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매우 열심이고 늘 준비되어 있는 모습이다. 척박한 한국의 상황에서 그들은 힘든 시기를 겪어 냈고 그 결과 살아남은 활동가들은 이 사회에서 존경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이 내뿜는 큰 긍정의 에너지 자체가 후배들이나 방관자들이 쉽게 참여하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싶다. 나도 그 운동에 참여하면 그런 무한 긍정의 삶을 받아들여야 할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 활동에 투신하기 위해서는 큰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내면이 포화되어 심신이 바쁜 현대인들이 충분히 깨닫고 투신의 결단을 내리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교회 쇄신이든 사회 개혁이든 민족운동이든 이들이 하는 일의 ‘의미’ 보다 무한 긍정과 무한 수용의 ‘삶의 방식’이 눈에 띌 때, 투신을 결정하기는 더욱 쉽지 않다. 그들이 참 의미의 세계에서 기쁘게 일하는 모습보다 수많은 ‘업무’를 복잡한 제도와 절차를 준수하며 적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매우 열심히 해 내야 하는 모습을 보는 후배들이 스스로 머뭇거리고 주저함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교회 쇄신을 두고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쇄신마저도 ‘바쁜 일의 연속’으로 다가올 때, 교회 쇄신의 의미는 증발되고 지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5. 큰 의심의 성인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조차 ‘무한 긍정’을 해야 하는가.” 그런데 우리 신앙인의 최고 귀감이랄 수 있는 성인 가운데에는 교회 안에서 무한 긍정을 하기는커녕 큰 의심을 품었던 분들이 적지 않다. 젊은 시절의 아우구스티누스나 프란치스코가 어땠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한평생 흐트러짐 없는 성인도 계시고 큰 의심의 파도를 세차게 넘은 성인도 계시다. 성인들의 공동체도 이러할진대 지상에 사는 우리 인간의 공동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느님 백성은 본디 매우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다. 무한긍정하고 한결같이 대기하는 신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신앙생활은 늘 성령대회 같을 수 없다. 감격과 충만이 넘치는 상태로 수십 년을 살 수 있겠는가. 교회에는 의심하는 자의 자리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교회는 ‘신앙의 노약자석’을 의무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오히려 큰 의심은 큰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 교회는 의심을 완전히 극복한 사람의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는 큰 믿음으로 가기 위해 큰 의심을 같이 나누고 생각해 보는 ‘죄인들의 공동체’다. 일부 진보적인 단체에도 이런 성찰을 적용할 수 있다. 의심하고 머뭇거리는 사람이 자리를 찾을 수 없다면 그 공동체는 ‘순도 높은 집단’이 아니라 ‘폐쇄된 집단’이고 ‘자유롭지 못한’ 집단으로 비춰질 것이다.

6. 교리 보다 깨달음의 교육을

이 점에서 평신도 교육을 생각해 보자. 필자는 교리 중심의 교육이 무한긍정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느낀다. 복잡한 제도와 절차, 그리고 순명이 강조되는 교리교육보다 일상에서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복음의 깨달음’을 교육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수님의 가르침(=교리)를 스스로 깨닫고 실제로 살아야만 교리교육의 목적이 달성될 것이다. 한국인이 평생 몰입하는 영어 교육에 빗대어 보자. 이를테면 교리교육은 ‘문법’이고 삶의 깨달음과 실천은 ‘실전 회화’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문법을 강조하는 교육을 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어휘와 문법 규칙을 문제 풀이 중심으로 달달 암기하는 교육을 했다. 그 결과 선생님에게 순종하고 주요 규칙을 어느 정도 아는 학생들이 양산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실생활에서 영어 능력이 형편없었다. 수많은 학생들은 흥미를 잃어버리고 교실을 떠났다. 하지만 요즘은 어린아이들에게 실전 회화 중심의 교육을 한다. 문법과 어휘 지식이 모자라도 괜찮다. 직접 말하고 듣고 대화하는 교육을 통해 자유분방한 영어의 감을 익힌다. 분명한 발전이다. 하지만 대학 입시를 위해 문법 위주의 공부를 하면서 실전의 감각은 더 자라기 힘들다.

우리 교회의 교리 교육은 어떠한가. 실제로 복음의 메시지를 깨닫게 하는 실전 회화 위주의 교육이 절실하다. 십계명, 삼위일체, 7성사 등등의 교리적 지식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법’을 『복음의 기쁨』처럼 쉽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사회교리 강의를 아무리 들어도 실생활에서 적용하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토플 점수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교리는 스펙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교리 교육은 ‘믿는 교리’와 ‘행할 교리’의 균형을 잡는 다양한 사례를 공유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교리적 지식도 중요하겠지만, 그와 함께 일상적 반성과 깨달음을 착실하게 쌓아가는 신자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요즘 열풍이 불고 있는 사회교리 교육도 마찬가지다. 사회교리의 역사와 내용이라는 ‘문법’ 교육이, 현재 벌어지는 ‘실전 회화’의 교육보다 선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언어의 바다에 빠져야 하고, 사회교리를 배우기 위해서는 사회적 복음 상황에 빠져야 한다. 세속화와 개인주의 등의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라는 교종의 말씀을 첫 시간에 설명할 필요가 있다. 언어의 바다에 빠지면, 스스로 한 단어씩 말하기 시작하다가, 어느새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리 중심의 교육 보다는 넓은 평신도 교양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계속)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평신도 신학자’의 자리를 기쁘게 모색하는 두 아이의 아빠이다.

<기사 제휴 /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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