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라! 200주년 사목회의 - 9]

마침내 교황 프란치스코는 한국 땅을 밟았다. 이 나라 사방팔방이 온통 눈물과 통한으로 갈가리 찢어져 아픔이 헤아릴 길 없어 서로 먹먹한 가슴만 부여잡고 그 슬픔을 달래고 있는 이 때, 마치 예수가 그러했듯이 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랬듯이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그 아픔이 얼마나 크냐, 내 억장도 무너진다’ 며 위로했다.

정녕 그가 한 말이 아닐지라도 그가 광화문 시복식 미사에서 34일째 단식중인 김영오씨를 만나기 위해 차에서 내려 다가왔을 때, 이미 말과 발걸음보다도 마음이 먼저 와서 그 희생자의 아버지와 숨진 세월호의 모든 순백의 영혼들과 가족들을 뜨겁게 안아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그가 늘 말했듯이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교회’라는 것을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번 방한에서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시복식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사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부닥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해야 하는 한국천주교회의 사회사목, 이른 바 ‘특수사목’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다른 말로, 교황 프란치스코는 한국천주교회의 오늘의 자화상, 그 현주소를 묻고 있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방한 첫날 한국 주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 교회 상황을 훤히 보고 있다는 듯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교회가 번영되었으나 또한 매우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목자들은 기업 사회에서 비롯된 능률적인 운영, 기획, 조직의 모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까지도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준보다 우선하여 취하려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십자가가 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힘을 잃어 헛되게 된다면 우리는 불행할 것입니다!”

이 말은 ‘특수 사목’ 의안 가운데 노동사목 의안이 “(노동사목은…) 노동자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사랑의 투신행위이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영역에서 소외되어 자신의 인간적인 목소리를 억제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노동사목의 대상”(3항)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다만 교황의 말은 급속도로 물신화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 특히 서울대교구와 성직자들에게 내리치는 죽비와 같은 경고라고 보이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 처지에 있다고 여겨진다.

‘평화드림’ 이라는 영리 회사를 창립한 지도 벌써 10여 년이 지났고 그 사이 많은 CEO 성직자를 배출해낸 ‘자본가’인 한국천주교회가 과연 ‘노동자’의 교회가 될 수 있는가, 부연하면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까지” 골수에 박힌 서울대교구와 ‘성직자 교회’가 돈이라는 맘몬 숭배를 그만두고 하느님을 다시 중심에 두라는 경고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로 보인다. 이쯤 되면 철저한 회개가 아니고서야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통렬히 비판한 신자유주의에서 한국 교회가 벗어날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특수 사목’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라고 한다면 지나치다고 할 것인가.

▲ 평화드림 홍보지<평화와 함께> ⓒ지금여기

사목회의 의안 중 농촌 사목 의안이 “농민 사목을 변두리 사목, 부수적인 사목을 뜻하는 특수 사목으로 취급하는 태도는 시급히 지양돼야 할 것”(20항)이라는 당시에는 절실하고 지당한 말이 앞에서 본 교회의 모습대로라면 너무나 무색해진다. 그렇다고 ‘200주년 사목 회의가 열렸던 80년대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반영하지 못한 현실의 절박한 여러 문제를 특수사목에 포함해 나가자’는 제안도 교회가 너무 멀리 와버린 현시점에서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앞서 농촌 사목 의안이 지적한 대로 이제는 ‘특수 사목’이 아니라 ‘사회 사목’으로 (이미 의안에 사회 사목이 따로 있긴 하지만) 그 형식과 내용을 전면 확장해내야 할 것으로 보이며, 또한 그 사목은 ‘한 목자가 양을 치는’ 형태가 아니라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실행되고 있지 않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동반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 사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히 사회사목의 목표는 소외된 모든 이들,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현대로 하면 이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뿐만 아니라 이들의 온전하고 전인적인 발전을 위해 연대하는 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교황은 다시 한 번 한국주교들에게 정중한 훈수를 두고 있다.

“(……) 사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시행하여, 한국 교회의 예언자적 증거가 끊임없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심은 구체적인 자선 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사회, 직업, 교육 수준의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사업적인 차원으로만 축소하고,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자신의 인격과 창의력과 문화를 존엄하게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방자치제가 자리 잡으면서 한국의 시민사회, 특히 그 가운데서 사회복지, 교육, 의료 분야에 힘써왔던 교회와 교회기관이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동사무소’였던 곳이 ‘주민 센터’로 이름을 바꾸어 달음과 동시에 그간 수도회나 교회기관에서 주로 담당해 왔던 장애인, 고아, 행려자뿐 아니라 주민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 이를테면 ‘인문학 강좌’나 다양한 문화 및 교양 프로그램들을 한 달이 멀다하게 쏟아 내고 있다. 교육과 의료는 이미 재벌과 대기업의 각축장이 된 지 오래고 서울대교구, 인천교구 등이 그 경쟁 대열에 합류해 교회가 얼마나 신자유주의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가를 실감 나게 보여 주고 있다.

몇몇 여성 수도회는 진통 끝에 영리 병원과 대학에서 손을 떼는 것으로 결정함으로써 수도회 정신을 지켜가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수도회는 새로운 전망을 세워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으로 보인다. 한 수도회는 수도회 정신대로 살고자 대형 병원을 교구에 넘기고 가난한 이를 위한 병원은 계속 유지하는 한편, 부자 동네의 본당 사도직으로 봉사하던 수녀들이 철수를 결행했다고 한다. 또 다른 수도회는 평신도와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그간 청소년 사도직이 해오지 않았던 미혼모를 대상으로 한 대안학교를 시작하려고 한다면서 앞으로 평신도가 협조자가 아닌 대등한 ‘파트너’로 관계를 맺어 나가면서 더 다양한 일을 찾아나가고자 한다는 긍정적인 소식도 들린다.

현실이 이렇다면 이제는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를 매우 세심하게 파악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일이 그 무엇보다 긴요하게 보인다. 청소년, 농민, 노동자가 ‘특수 사목’의 대상으로 국한되었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고 이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을 ‘사회 사목’의 대상으로 확장하되 더욱 섬세해지고 창조적인 상상력과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를 헤아렸음인가 교황은 시복식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에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을 전했다.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토록 깊고 큰 관심을 기울일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갈 길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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