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1일 (연중 제22주일) 마태 16,21-27

산행을 하다보면 어떤 바위는 좋은 쉼터가 되는 초석이 되기도 하는 동시에 먼 길을 둘러 가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몬이라는 바위가 그렇지 않은가요? 베드로라는 좋은 반석이 되기도 하지만 좋지 못한 물러가야 될 사탄으로 불리어지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에게 좋은 반석이 되기 위한 조건은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고백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 결코 그런 일이 당신께 닥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라고 주님을 붙들고 나무라기 시작할 때 시몬은 그만 주님께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복음서 처음으로 가서 차근차근 한번 볼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한 “이 때부터”(마태 16,21) 당신의 앞일을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4장 17절의 “이 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셨던 것처럼 어떤 사건의 전환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의 주님께서는 회개와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의 4장 17절부터 16장 20절까지가 좀 투박하게 말씀드려서 회개의 촉구와 하늘나라의 선포였다면 16장 21절 이하부터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밝히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공생활 초반기(회개와 하늘나라의 선포)의 마지막 시험에서 베드로는 합격점을 받았지만 공생활 후반기(복음의 핵심인 파스카)인 이 시기에 베드로와 제자들은 본격적인 시련기에 접어들었다고 봐도 될까요? 처음부터 받은 점수는 한마디로 F학점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마태 16,23)라고 하고 계시니까요.

▲ 예수를 유혹하는 사탄, 제임스 티소(1836~1902)
베드로 사도는 따르던 스승으로부터 졸지에 사탄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말입니다. 그는 “주님을 붙들고 나무라기 시작”(마태 16,22)하였습니다. 아마도 주님의 부활 체험 때까지 그 강도의 높낮이는 있었겠지만 내내 사탄의 경계선에서 머물지 않았을까요? 그 내용은 “결코 그런 일이 주님께 닥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였습니다. 그런데 어쩌나요. 베드로가 그렇게 장담하면서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그런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인데 말입니다. 바로 “마땅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원로들과 대제관들과 율사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일으켜져야”(마태 16,21)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주님께 “사람들의 일”(마태 16,23)만 닥치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이 아닌가요? 이 사탄의 유혹은 예수님 공생활 이전 광야에서 이미 거쳐 지난 것이었고 아마도 주님 공생활 내내 따라 다녔던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에게는 유혹이랄 것도 없이 아예 사탄의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보라고, 아래로 몸을 던져 보라고, 그리고 세상의 모든 나라(권력)와 영광 주겠다고 주님을 유혹했습니다(마태 4,3-9 참조). 베드로가 원했던 사람들의 일이란 결국 사탄의 것이었습니다. 사탄의 것은 결국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얻는 것이지요. 사탄의 것이란 결국 세상의 한 나라가 아니라 모든 나라와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교, 기만, 속임수, 아첨과 같은 권모술수가 아니던가요? 그래서 베드로는 그만 주님께 걸림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을 버리지 않고 자기 목숨을 구하려하고 온 세상을 벌어들이려 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려는 자세(마태 16,24-26 참조), 즉 비신앙의 자세가 아닌가요? 그렇게 보자면 하느님의 일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즉 신앙을 결코 놓지 않으려고 하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 2,20) 자신을 버리면 그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대신 자리하여 사신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증언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버려야 될 자기 자신은 또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움을 행하는 것, 사람들에게 드러나 보이려고 회당과 길모퉁이에 서서 기도하는 것,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려고 자기들의 얼굴을 찌푸리는 것(마태 6,1.5.16 참조) 정도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이 거짓 의로움과 거짓 기도와 거짓 단식에 공통되는 것을 금방 발견하실 수 있으시죠? 그것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는 거짓, 즉 위장된 선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버려야 될 자기 자신은 바로 위선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왜 사람들은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지요? 왜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하려 하는가요? 아마도 ‘온 세상을 벌어들이고’(마태 16,26 참조) 싶을 때 그러지 않는가 싶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상의 모든 나라(권력)와 그 영광(마태 4,8 참조)을 얻고 싶어서요. 그래야만 지배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야만 군림하여 신적인 존재가 된 것처럼 착각하고 살 수 있으니까요. 인간의 원죄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더러운 권력자들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하지만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 하기,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하기, 단식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 숨어 계시는 우리 아버지께 드러내기(마태 6,3.6.18 참조)가 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 6,4.6.18 참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입니다.”(마태 16,27)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에 갚아 주실 행실, 그것은 싱거워지지 않은 소금, 등경 위에 놓인 등불(마태 5,13.15 참조)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시오.”(마태 5,16)라고 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좋은 행실은 바로 소금이든 빛이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달란트를 활용하여 더 꽃피우고 벌어들이는 것(마태 25,16-17 참조)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땅을 파고 주인의 은전-주인의 은총이라고 말해도 될까요?-을 숨기는 사람(마태 25,18 참조)에 불과합니다. 주인님이 모진 분이어서요.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말입니다(마태 25,24-25 참조). 우리 모두에게는 그것이 하나든, 둘이든, 다섯이든 각자에게 달란트가 주어져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옳게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소한 일에의 충실성(마태 25,21.23)이 아니던가요? 주님의 은전(은총)을 숨기지 않고 최대한 살려 나가는 일입니다. 결국 주님을 모진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마태 11,26 참조)분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세상의 거짓 나라와 영광을 놓을 수 있으며 그때서야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마르 8,38 참조). 사실 언제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게 될까요?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취해야 하는데, 그래서 위선도 부리고 허풍도 떨어야 하는데 주어진 나의 작은 역할에 참되게 충실하라면 그런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참된 평화의 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편한 멍에이고 가벼운 짐(마태 11,30 참조)입니다. 죽어라고 억지로 짊어지고 가야할 고통이 아니라 그것은 선하신 주님께서 주신 기쁨의 십자가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불과한 세상의 나라(권력)와 영광에 취해 있고 그것이 훼손당할까 온갖 거짓과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는 세상의 권력자들과 위선자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의 권력이 판판이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겪겠지만 힘을 내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요한 16,33)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승리하시리라. 힘과 영광, 권력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십자가, 그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자리에서 보잘 것 없는 역할일지언정 그 역할에의 충실은 우리를 승리의 십자가로 이끌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세상의 나라와 영광의 문 앞에서 주저앉아 하염없이 그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모든 약한 이들, 특히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경의와 존경을 드립니다. 우리의 연대를!

신종호 신부 (분도)
대구대교구 옥계본당 주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