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7일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기다리던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고통과 억압 가운데 있는 많은 분들이 교종의 사목방문을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교종께서 그들을 보듬고 그들의 입장에서 불통의 세력을 향해 “회개하고 그들을 외면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언론에서 교종을 세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아이돌’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교종을 인기 있는 어느 유명 인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종께서 14일, 대통령과 정부 공직자, 외교단과의 만남에서 하신 연설에 등장하는 말씀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선, 평화, 정의, 연대, 진보와 발전, 사람 중심과 같은 개념은 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사회 교리를 통해서 드러낸 가르침입니다. 말하자면 교종은 혜성처럼 등장한 어떤 메시아가 아니라 바로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사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는 듯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가는 교회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는 바로 교회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여야 한다는 점을, 교회는 그런 사회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1항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8월15일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오마이뉴스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부인을 만나신 예수님의 침묵은 바로 가나안 부인의 슬픔과 고뇌에 함께 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지난 주 복음을 기억하시는지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돌려보내시고 따로 기도하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그 사이 제자들이 탔던 배는 파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제자들은 기겁하면서 ‘유령이다’하며 비명을 지르지요. 산에서 홀로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파도에 시달리면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제자들이 대비됩니다. 하지만 이 여정을 이끄는 마지막 종착점은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였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바로 제자들로 하여금 신앙과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 지역으로 물러가신 예수님께서는 그 지역에서 나온 어떤 가나안 부인을 만나십니다. 그 부인은 외칩니다. 마치 예리코의 눈 먼 사람처럼, 주님을 찾아온 나병환자처럼 말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딸이 귀신 들려 모진 고생을 하고 있다면 ‘우리 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쳐야 되지 않은가요? 그런데 이 부인은 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고 있지요? 부인은 이런 외침 속에서 부인은 자신의 딸과 자신을 마치 한 몸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몸처럼 여겨지는 것! 어떠할 때 그렇게 여길까요?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둘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는 상태가 아닌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그 부인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해서인가요? 하지만 제자들은 이 침묵이 어색하였을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침묵이 이 부인에 대한 주님의 거부로 알아들었을까요? 어쨌든 제자들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인을 돌려보내십시오.” 왜? 제자들 뒤에서 따라 오며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리코의 눈 먼 사람의 부르짖음처럼 그런 부르짖음이 성가시고 귀찮았던 모양입니다. 지금 곳곳에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통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어떤 공직자들에게는 그렇게 들리는 듯합니다. 권력자들은 그 부르짖음을 돌려보내려고 하고 조용히 있으라고 윽박지르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 가문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다 하시며 그녀의 신앙을 다시금 한 번 더 북돋우십니다. 그런 주님께 부인은 다가옵니다. 그리고 엎드려 절하며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저희 딸’을 도와 달라 하지 않으시고 저를 도와 달라고 하고 있으니까요. ‘자비를 베풀어 달라’, ‘저를 도와 달라’는 이 호소는 지난주에 들은 복음처럼 물에 빠져들기 시작한 베드로가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30) 했던 호소와 다를 바 없습니다. 물에 빠져들기 시작한 베드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고백하는 바와 같이 이 가나안 부인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신앙의 길에서 멀어져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어 보입니다. 가나안 부인의 절박함이 제자들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사실 강아지는 가나안 부인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 아닌가요? 그 신앙의 크기가 어찌 제자들의 그것보다 더 작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강아지는 바로 제자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가나안 부인은 그리스도의 은총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놓고 낮춤으로써 그녀가 바라던 바,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어느 보잘 것 없는 대상일지언정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절대자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연결됨을 이 가나안 부인을 통해서 우리는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에서 시작되지요. 진정한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이끌어 갑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갑니다. 고통과 억압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절박하고 진정한 사랑이 우리를 결국 구원으로 이끌 것임을 묵상합니다. 사랑을 살아가고 실천하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는 구원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신종호 신부 (분도)
대구대교구 옥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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