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30

작년 봄에 성당 앞마당에 소나무를 심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제일 모양이 좋은 세 그루는 죽었고 나머지 세 그루는 올봄에 새순을 틔우면서 소나무 특유의 깨끗한 푸른색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른 초봄부터 이 나무들이 다들 살아날까 싶어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던 참이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까치 한 쌍이 제일 건강한 소나무 가지 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새들은 병든 나무나 죽은 나무에 깃들이지 않는다면서요. 까치가 소나무에 둥지를 튼 것을 보고 그 소나무는 이제 뿌리를 내려서 싱싱하게 살아가겠구나 생각이 들어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런데 물속에 있는 생명들은 어찌하면 좋은가요? 전직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저질러 놓은 4대강의 물이 썩어가고 있고 그 수중의 생물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물속 생명들은 어디로 도망가지도 못할 텐데요.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쉼 없이 그 생명을 이어나가고 종족을 번식하며 번성하고자 하는, 그 창조 본연의 생명력이 탐욕스러운 몇몇 사람들의 손으로 인해 가로막혀 있다니 탄식할 노릇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본래의 생명이 자기 자리에서 번창하기를 희망하셨고 바로 그것이 세상 창조의 목적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좋은 씨를 뿌리고 그 좋은 씨가 밭에서 번성하기를 희망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좋은 의도와 지향은 어느덧 원수에 의해서 훼손되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자고 있는 동안,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는 어둠의 시간에 원수(악마)는 찾아옵니다. 그리고 밀 가운데다 가라지를 덧뿌리고 물러갑니다. 원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좋은 씨를 뿌려 풍성한 결실을 맺고자 하는 사람의 아들의 의도에 맞서는 것이었겠지요. 그리스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결실을 요한 사도는 당신의 첫 번째 편지에서 의로운 일을 행하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것(1요한 3,10 참조)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 머무는 것(요한 15,6)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렇게 본다면 악마의 의도는 의로운 일을 행하지 않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며 주님 안에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종호

농사를 짓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쉼 없이 가라지와 같은 잡초를 뽑아야지만 남아 있는 농작물이 잘 자랄 겁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뽑는 가운데 연약한 밀도 함께 뽑힐 공산이 크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어린 가라지와 밀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지요? 그래서 이 씨 뿌리는 사람의 아들(마태 13,37)은 단 하나의 밀도 뽑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가만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불의를 제거하기 위해서 또 다른 불의를 행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요. 결국 마지막 판단과 심판의 영역은 종들인 사람의 몫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것은 씨 뿌리는 농부이신 하느님의 영역임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겠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하나의 밀이라도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2베드 3,9)에 설령 그것이 가라지라 하더라도 다시금 밀이 되도록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지혜 12,19 참조). 마치 세리 마태오가, 세리 자캐오가, 완고한 율법학자였던 사울이 회개하도록 기다려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하늘나라는 겨자씨와도 비슷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밭(자기 동산 : 루카 13,19)에 뿌려지고 심겨진 가장 작은 씨앗은 자라서 한 그루의 나무(루카 13,18-19)가 됩니다.

잠시 쉬어간다 생각하시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 볼까요?

“형제 여러분,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시오. 세속의 몸으로는,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이도 많지 않으며 유력한 이도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이도 많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오히려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1코린 1,26-27)

“영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떠받쳐 주시기에”(로마 8,26) 작고 보잘것없는 겨자씨는 자라서 더 커지며 나무가 되게 하십니다. 동산에 심겨진 보잘것없는 가장 작은 겨자씨, 그 작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었기에(요한 12,24 참조)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 만큼 싱싱한 생명력을 지닌 나무가 될 수 있었네요. 하늘의 새들이 매일 날아다닐 수 없듯이, 그래서 어딘가에 앉아 쉬어야 하듯이 그들, “수고하고 짐을 진”(마태 11,28) 그들은 이제 살아 있는 그 나뭇가지에 와서 쉴 수 있습니다(요한 15,1-6 참조). 지친 하늘의 새들이 와서 쉴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나무이신 예수님, 예수님의 그 힘은 바로 십자 나무에서 완성됩니다. 그러고 보면 하늘나라의 비유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누룩은 반죽된 밀가루 속에 집어넣어집니다. 빵의 재료가 될 그 밀가루가 누룩으로 인해 온통 부풀어 오릅니다. 그렇게 해서 누룩은 밀가루 속에서 녹아 없어집니다. 하지만 밀가루를 부풀어 오르게 하여 빵이 될 준비를 시키네요. 녹아 없어지는 누룩, 그 누룩이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마태 11,29)과 닮았습니다. 녹아 없어지는 누룩이 되시고자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취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땅(흙)에 묻히셨습니다. 누룩이 녹아 없어지며 빵으로 변모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무엇이 떠오르시지요? 십자 나무와 빵이 된 누룩. 그리스도의 파스카와 성체성사가 하늘나라와 이렇게 연결됩니다. 성체성사와 그리스도의 파스카는 자웅동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사람처럼,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처럼(마태 13,44-46) 그렇게 정의와 사랑(1요한 3,10 참조)에 투신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좋은 씨를 뿌린 밭에 웬 가라지냐고 실망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좋은 씨를 더 잘 가꾸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가장 작은 씨앗들 안에 풍성한 온갖 가능성을 찾아보고 존중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업신여기지 않고 하나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듯이 말이지요(마태 18,10; 25,40.45 참조). 더 나아가서 썩어 없어질 밀알이, 녹아 없어질 누룩이 되도록 초대하십니다. 이 세상 속에서 말이지요.


신종호 신부
(분도)
대구대교구 옥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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