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빛의 눈길 - 이찬수]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는 ‘이슬람교도’를 의미하는 은어로 ‘무젤만’이라는 용어가 쓰였다고 한다. ‘무젤만’은 단순히 종교인으로서의 무슬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철저한 무관심으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특징을 더 이상 갖지 못한 이들을 의미하는 은어였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인간이 처절하게 죽어나가는 일도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비인간적인 죽음과 죽임은 예외적인 일이어야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는 일상이었다. ‘무젤만’은 마치 ‘걸어 다니는 시체’와 같아서, 비록 실상을 증언할 수 있는 의지와 의식은 없지만, 역설적으로 아우슈비츠의 진정한 증언자들이라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바로 예외 상태가 상시(常時)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극한 상황이 바로 일상생활의 범례가 되는 장소이다.”

세월호 참사 역시 예외적이어야 할 사건이지만, 실상은 우리 사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일상의 속살과 같다. 결과론적으로 보건대 참사가 날만 하니까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외가 일상을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러 달이 지나도록 수습은커녕 사태의 책임자도 파악하지 못하는 난국이 지속되고 있는 것 아닌가.

2011년 9월 22일 부산지방해양항만청에서 서울시 교육청에 학생들을 수학여행 보낼 때 제주 뱃길을 이용해 달라는 협조공문을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우석훈, <내릴 수 없는 배>, 웅진지식하우스, 2014, 105-106쪽). 2009년을 정점으로 국내 연안 여객선 수송이 줄어들자 수학여행이라는 교육 행위를 볼모로 해서라도 국내 여객선 이용을 활성화시키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정부도 ‘크루즈산업 지원 및 육성에 관한 법률’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하는 등 여객선 사업에 대한 지원 방안을 모색했다. 이 법안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그 과정에 배의 수명을 기존 20년에서 최대 30년까지 연장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당장의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안전’은 사업자의 안중에 없었고, 여객선 사업을 회생시키려는 당국에도 그다지 현안은 아니었다. 행정이 공적으로 작동되는지 감시하는 감사 기구도 안전과 관련한 현안들을 제대로 감사하지 못했다. 일본이 배의 운용 기간을 줄이는 방식으로 공적 안전을 도모했다면, 한국은 배의 운용 기간을 늘이는 술수로 상업성만을 내세운 것이다(우석훈, 105-129쪽). 부산지방해양항만청의 공문이 세월호 침몰의 직접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 공문이 작성되고 유통되는 과정이야말로 학생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참사의 복잡한 원인을 잘 보여준다. 세월호 사건은 사실상 필연에 가까운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참사에 국가의 책임이 크다. 참사 자체는 물론 수습 과정의 무능함에서도 국가는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국가는 사실상 가해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 국민이 너무 명백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아직 10명의 실종자가 있는 상황을, 사태에 책임이 큰 개인이나 집단들 간에 책임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한 모략과 타협이 난무하는 모습을, 이익을 극대화하거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술수를, 그리하여 온 국민이 비통해 하면서도 그 비통함을 멈추지도 못하는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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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에 대해 청와대조차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라’며 책임 회피성 말을 하는 모습을, ‘국가안전처’를 총리실 산하에 신설하겠다는 말로 사실상 청와대는 국가적 재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전략을 노골화하는 모습(우석훈, 위의 책, 130쪽, 180쪽)을…. 참사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도 국민이 확인하는 것은 책임을 줄이거나 회피하기 위한, 그리고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한 전략들뿐이다.

사태의 수습에 책임이 막대한 정부 여당은 유가족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에 대해 사실상 피해자가 직접 수사하는 것은 기존 법질서를 그르친다며 끝까지 반대하고 있다. 특별검사만이 수사할 수 있고, 책임자를 가려 기소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일리는 있다. 그렇지만 과연 사태의 원인 제공자 혹은 가해자는 수사를 할 자격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을 할 수 있을 때에만 일리가 있다.

분명히 국가는, 설령 일부라고 할지라도, 이번 참사의 원인 제공자이다. 수습에 무능했던 주체다. 사실상 원인 제공자에 의해 구성된 이들이 과연 원인 제공자를 온전히 수사할 수 있을까. 아니 조사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예외적인 일들이 쌓여 참사를 낳고, 수습 과정에도 예외적이어야 할 일들이 연속되는 마당에, 조사와 수사는 일상의 합리적 원칙을 유지할 수 있을까.

원인 제공자에 의해 구성된 이들이 원인 제공자를 밝힌다는, 그런 예외적인 일이 관례나 질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권력에 가까울수록 책임도 커진다는 사실을 국민은 다 알지만,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권력의 몸부림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강남대 교수를 지냈으며, <종교로 세계 읽기>, <믿는다는 것>,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인간은 신의 암호>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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