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빛의 눈길 - 이찬수]

악의 평범성과 도덕적 개인

한나 아렌트는 2차대전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으로 만들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악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어떻게 평범한 것일 수 있을까.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이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며 반복적으로 진술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히만이 엄청난 사태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생각하는 데 무능력’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홀로코스트라는 전무후무한 폭력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가 증언하듯이, 홀로코스트 책임자들은 ‘학살’이 아니라 ‘최종해결책’, ‘강제이송’이 아니라 ‘이동’, ‘가스실살해’가 아니라 ‘특별처리’ 등등으로 썼다고 한다. 살인 행위가 사무적 행정 절차로 둔갑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전무후무한 폭력의 책임자들의 머리 속에서는 사람을 사물화하고 인간을 일상적 행정 처리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단학살과 일상적 일과는 하나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악은 평범하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국제정치학자이자 기독교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가 주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에서 개인적 도덕성과 사회적 비도덕성을 구분했던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개인적으로 도덕적이라고 해서 사회적으로 도덕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은 본성상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에 대한 동류의식·공감·이해심을 갖고 있고, 다른 이들의 이해 관계도 고려할 줄 안다는 점에서 도덕적이다. 이기심이 발동해 충돌하더라도 타협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하지만 집단은 “충동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때에 따라 억제할 수 있는 이성과 자기 극복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이 훨씬 결여되어 있고” “심한 이기주의가 모든 집단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개인에서와 같은 도덕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개인들의 이기적 충동이 중층적으로 결합된 집단이기주의가 합리적 판단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거대한 재난을 낳고도 해결은커녕 여전히 우왕좌왕하는 난국적 상황을 여실히 경험하고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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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2014.4.16~)를 수습하는 공간은 수습에 책임이 큰 집단들 간의 모략과 타협과 경쟁의 공간으로 작용하고 있다. 개인들의 울부짖음은 넘쳐나지만, 이것을 관리할 국가는 비어 있다. 집단의 외적 목적은 생명의 확장 혹은 죽음의 최소화에 있다면서도, 정작 내적 목적은 사실상 자기 집단, 자기 자신의 극대화이다.

실종자 수색 작업은 자기책임을 줄이기 위한 거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거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거래가 된다. 한시가 급한 실종자 수습보다 유력 정치인, 대통령 의전에 더 힘을 쏟으며, 대통령은 ‘의례적’ 사과를 한다. 선체 인양을 청해진해운과(사실상 해경과) 독점 계약한 구난업체(언딘)는 해경 혹은 선사와 맺은 계약관계의 유지가 실종자 수색 이상으로 중요하다. 해경은 특정 업체와의 독점 계약을 통해 사고의 원인과 결론을 가능한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확보한다.

선사(청해진해운)는 탑승객의 생명과 안전보다 과적과 불법으로 수익을 극대화하고 사고의 책임도 회피 또는 축소하려는 꼼수에 우선순위를 둔다. ‘거대한 죽음’에 대해 청와대조차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라’는 책임 회피성 말을 한다. 종교(기독교복음침례회)는 감정적 변화를 구원의 결정적 증거로 내세우며 예배와 수양회를 통해 종교적 감정의 통제와 조절을 도모한다. 그 과정에 생긴 헌금은 실제로는 사업의 수단으로 이용되며, 사업도 신앙적 실천이라는 명목 하에 정당화된다.

이렇게 해경, 정부, 선사, 종단은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서로 다른 행보를 보인다. 엄청난 죽음 앞에 안타까워하는 개인들의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비도덕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텅 빈 국가
참사를 수습하는 것은 시간과 망각

개인들의 울부짖음을 연결 지을 사회적 장치가 확보되어 있지 못하다. 가령 자살자가 많다는 것은 자살자가 기댈 사회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사에서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개인들의 희망과는 달리 국가는 ‘거대한 빈 틈’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비판했듯이, 다원화된 사회가 도리어 타자를 계산에서 제외한다. 다원화한 개인의 방 안에 들어가는 순간 더 이상 타자를 묻지 않는다.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주장도 현실에서는 아무도 형제·자매가 아닐 수 있다는 역설을 품고 있다. 이웃에 대한 언사 속에 이웃이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지젝의 말마따나 “이웃은 사물”이다. 타자의 타자화, 즉 타자를 다시 타자화해, 타자를 실종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거대한 틈새, ‘공(空)-간(間)’으로 남는다. 그래서 참사가 벌어져도 수습되지 않는다. 개인들의 아픔은 있어도 수습하고 위로하고 책임지는 국가는 없다. 참사를 수습시키는 것은 시간이고 망각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재난일지 모른다.

누구를 뽑을까

6.4 지방선거가 시작되었다. 이미 사전투표를 통해 11.49% 이상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했다고 한다. 6월 4일에 본격 선거를 남겨두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의 투표 기준은 명백하다. 개인의 도덕성을 사회적으로 네트워킹할 수 있는 사람, ‘빈 틈’, 즉 ‘공(空)-간(間)’으로 남아있는 국가를 풀뿌리로부터 채워갈 능력과 열의가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겉으로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외쳐대지만, 속으로는 그저 자기뿐인 사람은 가차 없이 비판하고 버려야 한다. 관심이 있어야 그런 것이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면서도 홀로 안타까워할 줄만 알았지, 그 아픔을 연결시킬 줄 몰랐던, 많은 소시민들이 더욱 각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개인들이 아래로부터 연대하지 않고서는 세상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사회는 여전히 비도덕적으로 남는다. 국가는 그저 이름뿐, 텅 빈 공-간을 유지할 뿐이다. 비도덕적 사회, 텅 빈 국가를 유지시키는 책임의 보이지 않는 근간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 나아가 울부짖음에 공감하거나 책임질 줄 모르는 이들을 뽑아놓은 이들에게 있다. 그리고 보이는 책임은 결국 저만 아는 정치꾼들이 져야 한다.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강남대 교수를 지냈으며, <종교로 세계 읽기>, <믿는다는 것>,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인간은 신의 암호>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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