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빛의 눈길 - 이찬수]

신학적으로 ‘은총’은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인간과 세계 안에 내어주신 하느님 자신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은 없다. 내 세포 하나도 내가 만들지 않았다. 나무 한 그루, 공기 한 줌, 물 한 방울 그 어떤 것도 인간이 창조해낸 것은 없다. 인간은 모든 것을 거저 받았다. 내가 먹는 쌀 한 톨도, 그 쌀 한 톨을 먹고 소화시키는 우리의 위장이나 창자도 그냥 그렇게 주어진 것이다. 다 거저 받았다. 지구도, 우주의 원리도 본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런 원천적 사태를 그리스도교에서는 은총이라 부른다.

이 원천적 사실의 의미인즉,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꾸란』의 요구도 마찬가지이다: “최고의 종교는 이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이에게도 행해야 한다. 네가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은 다른 이에게도 고통스럽다.” 단순한 듯 자명한 이 사실이 종교의 기본 원리이다.

모든 것은 거저 주어졌지만,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구현해내는 일은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거기에는 은총의 세계를 깨닫고 그 깨달음대로 살려고 애쓴 선각자들의 희생이 들어있다. 먼저 깨달은 이들이 희생을 무릅쓰고 기존 흐름에 저항하면서 은총이라는 놀라운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가게 된 것이다.

저항으로 은총을 얻은 먼저 깨달은 이들

가령 예수는 아버지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주신다고 가르쳤다.(마태 5,45)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사람에게 생래적으로 선‧악이나 정·오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가르치다가 생래적 차별을 당연시하는 기성 종교인들에 의해 희생당했지만 예수의 저항적 가르침은 한 줄기 새로운 희망을 발생시켰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그리스도교이다. 은총이라는 말이 지닌 아름다운 뉘앙스와는 달리 실제로 은총에 대한 인식은 모진 저항의 산물인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결과물들 역시 저항의 산물이었다. 인간이 하늘이라는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희생을 담보하며 성취해낸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였다. 모든 이가 출가해 열반에 들 수 있도록 허락한 붓다는 당시 힌두교 사제들에 의해 삿된 가르침(외도)으로 비난받았고, 무함마드가 알라는 한 분이시며 알라 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하다고 하자, 자신들의 최고신을 농락했다며 당시 기성세력은 무함마드를 죽이려 했다. 그런 식으로 남과 나를 같이 보는 경지에 대한 인식은 목숨을 건 저항의 결과이다. 그런데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 은총을 구체화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세월호’의 한자상 의미가 ‘세상(世)을 넘는다(越) 배’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때 ‘세(世)’는 공간적 세계가 아니라 시간적 세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세월호’의 작명자가 이것을 알고 지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떻든 ‘세월’은 세상의 파고를 넘어선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대단히 종교적인 이름 같은 느낌도 준다.

그런데 이번 참사로 드러나는 속내를 보니, 그 작명자가 보는 ‘세상’(世)이란 사실상 종교와 사업이 이미 한 몸이 되어 있는 세상이었던 것 같다. 신앙을 수단으로 사업을 벌이고 자본을 재축적하는 방식으로 세상의 파고를 넘어서려(越) 했음이 빤히 보인다. 신자들에게는 신앙적 각성을 필생의 목표로 내세우면서 정작 종교 지도자나 다름없었던 이들은 천박한 자본주의에 입각한 맘몬의 축적을 사실상의 목표로 삼았던 것 같다. 그들이 세상의 파도를 뛰어넘는 방식은 은총의 구체화나 사회화가 아니라, 그저 자본의 확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世)월(越)호(號)’ 선원의 70% 이상이 단기직 비정규직일 수 없고, 수백 명이 차가운 바다에서 죽어가는 데 해운사의 안위부터 챙길 리 없으며,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매뉴얼에 이렇게 총체적으로 둔감할 리 없겠기 때문이다. 혹시 해운사와 종단 간에 법적 관련성은 없을지 모르지만, 기업의 실소유주 일가가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설교를 하던 사실상의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점에서, 내면적 관련성마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교인들이 세상을 넘는 방식은, 설령 다 같이 조금씩 가난해지더라도, 이웃과 자신 사이 차별을 두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 인간과 세계-내-존재들의 존엄성을 확보해가는 방식이어야 한다. 어디 종교인뿐이겠는가. 그것은 원칙적으로 모든 이의 자세여야 한다.

세월호, 모든 이가 양심적 책임을 져야한다
종교의 이름을 내세우고 사회적 불평등에 눈감아온 이들에게 책임 물어야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대체로 반대이다. 이번 참사의 주범은 도처에 널려 있다. 여전히 허둥대는 ‘해경’은 물론 ‘안행부’, ‘해수부’도 주범이고, 자신들은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라’ 강조하던 ‘청와대’도 예외일 수 없다. 나아가, 이번 참사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도덕성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적으로까지 도덕성을 만들어내지 못한 모든 이의 책임이기도 하다.

법적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 ‘세상을 넘어서는 배’ 안에 영혼조차 갇혀버린 이들은 사회와 국가에 의한 ‘정책적 타살’이기도 하기에, 그 정책의 책임자는 반드시 가려내어야 한다. 그렇지만 양심적 책임은 모든 이가 져야 한다. 세상을 경제적 효율성과 성과주의로 몰아간 이들, 특히 종교의 이름을 내세우고서도 사회적 불평등에 눈감아온 이들의 양심적 책임은 비할 바 없이 더 크다. 사회적 법정에까지 세울 수는 없지만, 양심의 법정에는 자발적으로 서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1932)를 쓴 바 있는데, 개인은 물론 사회도 도덕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에 대한 책임은 사회에 책임이 큰 사람일수록 크다.

인간이 양산해내고 있는 각종 재난의 시대, 종교와 비종교인의 기준은 아픔에 대한 책임감의 크기와 실천력의 세기에 비례한다. 교회에서 사찰에서 종교 의례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종교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힘들어져가는 세상이다.


 
 
이찬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강남대 교수를 지냈으며, <종교로 세계 읽기>, <믿는다는 것>,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인간은 신의 암호>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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