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빛의 눈길 - 이찬수]

▲ 미켈란젤로의 시스틴성당 천장화 ‘하느님이 땅과 물을 나누심’
그리스도인의 주류 신관은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을 인간의 세계 ‘저 바깥’, 자연적 흐름 ‘너머’에 있는 존재, 즉 초자연적 존재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여기’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 신은 알려지거나 경험되기 보다는 믿어져야 한다고 요청된다. 신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인간 비슷하게 상상하면서, 그 신이 저 ‘밖’, 보이는 곳 저 ‘너머’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밖’을 향해 기도하고, 하늘을 향해 찬양한다. 신의 초월성을 공간적으로만 이해하다보니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신이 전능하다고 믿으면서도 인간 형상을 한 동일한 존재가 어떻게 여러 사람들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지 의심하기도 한다. 신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는, 즉 ‘있지 않은 곳이 없다’면서도, 여전히 구름 너머를 바라보며 기도하고 노래도 부른다. ‘무소부재’를 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전지(全知)’의 개념으로 대체하거나, 전지하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인간 형상의 어떤 존재가 지상에 전파 같은 것을 보내는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러다보니 구원도 사후에 구름 위에 있는 어떤 공간, 즉 천당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이해한다. ‘지금 여기’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언젠가 다른 때’에 이루어질 구원을 주로 얘기한다.

진학과 졸업을 막는 교회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의심받는 시대가 되었다. 이전과는 사유방식이나 세계관이 아주 달라졌다. 요즘 학교에서는 원자나 분자, 전자, 쿼크 그리고 초끈이론 등 물질의 최소 단위에 대해 배우고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시켜 설명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신을 물질과 대립적으로 가르치고 말한다. 학교에서는 무한할 정도의 우주에 대해 상상하는데 교회에서는 신이 지구 밖 어딘가 천장 같은 곳 위에 있는 듯 설교하니 그리스도인 자신도 그런 가르침이 과연 타당한가 의심을 한다. 우주에서 한 점 먼지만도 못하게 작은 지구에, 그 지구에서도 한 점 먼지만도 못할 정도로 미소한 인간에게 신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의구심을 품는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무신론자가 된 것은 세계가 변하고 언어가 달라지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천당에 계신 하느님은 영원불변하다며 고집하다가 벌어진 상황이다. 시대에 어울리는 신론을 확립하려 하지 않은 채, 정말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은 채, 이해보다는 교리적 믿음만을 강권해 온 탓이다. 그것이 고민하는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초자연적 유신론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만은 없다. 이른바 신앙이라는 것도 사람 마음과 관련되어 있는 현상이다 보니, 마음의 수준을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 · 고등학교로, 그리고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배움의 수준을 높여가야 하는데, 신앙의 진학을 못하게 하는 교회의 분위기가 문제다.

가령 어렸을 때는 아빠,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큰 존재 같고, 어둔 밤길도 엄마, 아빠만 있으면 그다지 두렵지 않게 느껴진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엄마도 아빠도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엄마나 아빠의 고마움도 느끼고 인생의 이치와 깊이도 깨닫게 된다. 엄마, 아빠도 여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스스로에 대해 더 책임지는 존재가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도 더욱 성숙해진다.

신앙의 성숙 과정도 마찬가지다. 신앙이 성숙하려면 신앙의 근간인 신에 대해 주체적이고 깊이 있게 성찰하는 것이 필수다. 그런데 제도화된 종교에서는 별 고민 없이 초자연적 유신론 수준에만 머물도록, 신앙의 학교에서 ‘졸업’하지 못하도록 하는 구조이다. 수준을 높이는 행위도 자기 종교나 교회의 수준 안에서만 높이도록 요구한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질적 성장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종교지도자든 신자든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향이 여전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자세와 신론이 결정적 걸림돌이 된 시대가 된 것이다. ‘진학’과 ‘졸업’이 되지 않는 이러한 구조에 현대인이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범재신론이다

그렇다면 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신은 ‘있지 않은 곳이 없다’(無所不在)는 명제를 정말로 충실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을 구름 너머 특별 공간에 있는 존재로 상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바로 내 안에 계신 분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옆에 계신 분, 네 안에 계신 분, 나무 한 그루에도 계신 분, 기쁨과 슬픔 안에도 계시는 분, 무한한 우주를 몸 삼아 계시는 분으로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신을 특정 공간에 제한된 사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작용하는 영(靈, the Spirit)으로 인식하고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영이란 귀신이나 죽은 이의 혼령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은 살아 있는 것들을 살아 있게 해 주는 생명력을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영은 모든 생명 현상의 근거이자 어디에나 작용하고 있는 힘이다. 인간이 영에 대해 생각하지만, 더 근원적으로 보면 영은 인간의 생각 혹은 인식의 근원이다. 영으로서의 신은 인식의 주체이기에 인간에 의해 대상화된 인식을 넘어선다. 신은 인간의 주체이기에 내재적이고, 인식을 넘어서기에 초월적이라는 것이다. 신은 ‘바로 여기에 있지만’ 그렇게 인식된 신이 신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입장을 ‘범재신론’이라고 한다.

범재신론을 영어로는 panentheism(패넨시즘)이라고 한다. 라틴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이 용어는 현대 영어로 풀면 all(pan)-in(en)-God(theos)-ism이 된다. ‘모든 것(pan)이 신(theos) 안에(en) 있다는 주장(ism)’이다. 모든 것이 신 안에 있으니 신은 모든 것보다 더 크다.

‘모든 것이 신’이라는 범신론(pantheism)과는 달리, 범재신론은 신의 초월성을 살리고자 한다. 이 초월성은 단순히 공간적 초월성만 의미하지 않는다. 신은 공간적으로도 크고, 인식된 것을 넘어선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만물을 감싸 안는 출처이기도 하고, 인식의 대상이면서 인식의 근원, 즉 인식의 주체이기도 하다. 주체이기에 인식된 대상 안에 갇히지 않는다. 인식된 것의 범주와 내용을 언제나 넘어선다.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이렇게 범재신론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모두 살리려는 현대적 신론이다.

ⓒ김용길

하산을 꿈꾸며

범재신론을 체화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과제다. 범재신론적 그리스도인에게 신은 내 안에 계신 분일 뿐더러, 내 옆에, 네 안에, 나무 한 그루에, 기쁨과 슬픔 안에도 계시는 분이다. 신은 없는 곳이 없으니, 교회랄 것도 따로 없다. 모두가 교회다. 진리는 산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거리에도 있다. 그래서 언젠가 있을 하산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하산할 자격이 있는 자만이 하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하산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세계와 하산이 막혀 있는 구조는 아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면 하산(下山)하도록 하는 것이 불교에서 배운 우리의 오랜 종교적 자세이다. 세상을 스승 삼아 가르치도록 하기 위해서다. 모두가 하산할 수 있는 정도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신자는 하산을 위해 공부(工夫)해야 하는 자다. 교회 지도자도 신자의 하산을 준비하고 이끌어야 한다. 지도자가 하산한 것이나 다름없는 질적 수준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이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언제까지 제도 교회 안에 갇혀 있고 또 가두어 두기만 할 것인가. 교회라는 형식은 언젠가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진정한 운명이다.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강남대 교수를 지냈으며, <종교로 세계 읽기>, <믿는다는 것>,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인간은 신의 암호>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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