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옥, 이재승 교수의 인권대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는 최근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가 대두되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이전 정부가 약속했던 대체복무제 도입을 사실상 거부되는 상황에서 ‘전쟁없는 세상’ 활동가인 여옥씨와 법철학을 전공한 건국대 이재승 교수와의 대담을 기획하였다.

     한편 촛불시위가 격렬하던 작년 7월 27일 신월동 성당에서 양심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이길준씨가 지난 1월 23일 오전에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2년 형량을 구형 받고 안양교도소에 수감중이다. 


여옥/ 요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침공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을 보면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모두 이 전쟁에 참여하기를 원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전쟁이라면 그렇게 느낀 개인이 참여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년에 이스라엘에서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에 다녀온 친구가 한국에 온 적이 있었어요. 그 친구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과 봉쇄에 반대해서 병역거부를 했다더군요. 어떤 차원이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권리가 법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재승 교수: 어려운 질문입니다. 국가권력은 어떻게 해서든지 시민을 거리낌 없이 부리려고 하고, 시민은 자신의 양심에 기초해 행동하는 자유를 얻고자 하지요. 이걸 조화롭게 관철시키는 게 민주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개인의 양심이 어느 정도 되어야 보호할만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서 문제가 생기죠. 명확히 이건 권리고 저건 권리가 아니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야기하는 우리는 지금 인간을 오로지 개인으로서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인간을 개인적 주체로서 중시했던 시대는 거의 없었죠. 있다 해도 그리 오래지 않은 일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공동체 안에 있기 때문에 공동체의 요구와 개인의 양심은 충돌할 수밖에 없죠. 이러한 충돌이 극대화된 사례가 양심적 병역거부고, 충돌의 역사를 통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한 곳에서는 관용이든, 타협이든, 실용이든, 인권이든 대체복무를 도입하였죠. 서양에서 18세기부터 시작된 일이고, 20세기에 보편화되었지요. 

독일은 헌법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재승 교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제국이 끝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졌지요. 독일군대는 전쟁책임과 관련하여 혁파되었고요.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히틀러는 1935년에 징병제를 다시 도입한 후, 끔찍한 전쟁과 유대인학살을 저질렀지요. 당시에 수많은 병역거부자들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연합국은 종전 후 독일군대를 다시 폐지하였고, 이후 독일은 평화주의 흐름 속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1949년 독일헌법에 도입했지요. 헌법의 차원에서는 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그리스내전과 한국전쟁 이후에는 동서간의 냉전질서가 공고화되었습니다. 물론 냉전질서는 2차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시작되었지요. 어쨌든 서방세계는 1949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군사안보동맹을 출범시켰고 1954년에 마침내 독일(서독)을 여기에 가입시켰습니다. 독일이 이제 재무장의 길로 들어선 것이지요. 1955년에 지원병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이어서 56년에 헌법을 개정하여 징병제를 도입하고, 징병제와 헌법상의 양심적 병역거부권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60년대부터 독일에서 징병제와 대체복무제가 실제로 시행되었습니다. 상당한 변화도 있었지만 독일의 대체복무제도는 세계적으로 모범이 되고 있지요. 복무기간도 현역이나 대체복무나 현재는 9개월로 동일합니다. 

독일의 대체복무제도는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지요. 최근에 그리스의 대체복무에 대해 많은 비판이 쏟아지고 있던대요. 그 나라는 어떤가요.

그리스는 2001년에 대체복무제를 도입한다는 것을 헌법 제4조 6호 밑에 써놓았지요. 본문에 넣지 않고요. 그런데 문제가 많습니다. 그리스 현대사를 보면 정치적 자유나 관용의 정신에 있어서는 다른 서유럽국가들에 비해 후발적이지요. 과거 그리스에서 병역거부자들은 주로 여호와의 증인들인데, 근래에 비종교적 병역거부자들도 등장했습니다. 비종교적 거부자들의 영웅적인 단식투쟁, 당국의 가혹한 반복처벌, 국제사회의 비등하는 여론압박에 못 이겨 당국은 97년에 와서야 현실적인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게 되지요. 그전에는 물론 말도 안 되는 대체복무제도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거부했지요.

그런데 징벌적 대체복무라고 말할만한 요소들은 아직도 이 나라에 다 모여있습니다. 이를테면 군복무보다 2배나 되는 장기간 복무를 해야 하고, 도회적 일상적 편의를 부수적으로 누릴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일부러 섬, 오지 또는 중병 만성질환자가 묵는 고립된 곳으로 보냅니다. 휴일은 고작 한 달에 이틀뿐입니다. 이 실상을 전쟁반대 인터내셔널(WRI)이나 그리스 인권옴부즈만이 조목조목 지적하였지요. 당시 국방장관이 “대체복무자들은 어떤 편의도 누려서는 안 된다, 일주일에 7일을 근무해야 한다”는 둥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했지요.

대체복무 신청자격에 관한 것도 정말 엉뚱하고 촌스럽지요. 사냥허가증을 소지한 사람이나 폭행죄로 처벌받은 사람은 대체복무 신청자격이 없다는 것이지요. 양심적 거부자들 중에 채식주의자가 많아요. 그러나 짐승을 사냥하는 것과 전쟁에서 사람을 살해하는 것, 일상적이고 우발적 폭행사건과 전쟁에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동일한 게 아닙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양심적 결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살겠다’는 것인데, 양심의 논리에서 보자면 이해할 수 없는 제한이지요. 이런 조건은 가톨릭 시성식에서 필요한 사항 아닌가요.

전쟁없는 세상의 활동가 여옥
유엔에서 여러 차례 한국정부에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권고를 했는데, 한국정부는 밖에 나가서는 한다고 하고 실제로는 ‘연구중’이라는 핑계를 대며 안 하는데, 이런 거짓말을 국제규약으로 압력을 가할 수 없는 것인지, 강제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인지 답답합니다. 한국정부는 국제규약을 이행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국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정부가 국민을 핑계로 이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나라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자유권규약(ICCPR)상의 권리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유엔인권이사회(Human Rights Council)나 자유권규약위원회(Human Rights Committee)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자유권규약상 양심의 자유에 포함된다고 수차례 결정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유권규약을 해석하고 그에 대해 권고하고 그 기준을 정하고 규약상의 의무 이행을 감시하는 규약상의 공식기구가 결정한 해석을 무슨 근거로 아니라고 우기는 거죠.

예컨대 대한민국 헌법에 대하여 헌법재판소가 결정한 것을 헌법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것과 같지요. 어쨌든 인권규약에는 양심적 거부권이 인정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정부는 규약당사자로서 위원회의 결정을 이행해야할 의무가 있죠. 규약위원회는 개인통보절차를 통해 구제결정을 반복해서 내리고 있습니다. 다만 위원회가 권고결정을 개별국가에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거죠. 어쨌든 권고를 이행하지 않으면 국제적인 인권신인도는 떨어지겠지요. 

국방부에서 대체복무에 대한 연구용역 결과를 발표하며 국민들의 반대가 많아서 대체복무제 도입이 힘들다고 했는데, 자료를 받아보니 국방부가 근거로 내세운 국민여론조사는 연구용역보고서의 극히 일부분이었고 전체 보고서의 결론은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해야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 서둘러 발표한 셈입니다. 그걸 보면서 처음부터 대체복무제를 할 생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민여론조사 설문 문항을 보니 병역거부자를 군대에 보내야하냐, 대체복무제를 시켜야하냐, 두 가지 문항으로만 물어서 그들이 감옥에 가는 현실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고요. 저처럼 활동하는 사람들은 대체복무제의 필요성에 대해 계속 홍보하고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 문제가 국민여론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하면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답답합니다.

대부분 응답자들은 징병제 아래서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 자식들이 남성인 한에서 병역의무를 진다는 것을 가정하겠죠. 군대가는 사람들이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체복무제를 부정하지요. 그러므로 국민 대다수가 지지한다면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것은 백년이 가도 시행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지요. 연구용역의 중간발표를 통해 잘 알려졌듯이, 실제 전문가그룹 응답자들은 압도적으로 대체복무제 도입을 지지했지요. 결국 어떤 의도로 어떤 방식으로 물어보느냐에 따라 응답율을 달라지죠.

만약 ‘너 군대 갈래 대체복무 할래?’하고 물으면 당연히 ‘군대는 왜 가’하고 답할 것입니다. 대체복무 도입하면 아무도 군대 안 가려고 할 테니 고로 대체복무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유도하지요. 대안을 만들려는 정책적 조사라면 질문 구성은 ‘네가 군대 가더라도 어느 정도 조건이면 대체복무제를 받아들이겠느냐?’여야겠죠. 뻔한 질문을 통해 일반응답자의 감정에 불을 질러 너무 의도적이고 병역거부자에게 너무 불친절한 답변을 유도한 것입니다. 물론 국방부 용역조사 이전에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대체복무 지지자 비율이 반대자 비율을 능가했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네요.

어쨌든 그런 악조건에서도 30%정도가 대체복무를 지지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죠. 국민들 대다수가 대체복무제를 대체로 이해하고 있으며, 다만 감정상으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봐야죠. 그동안 병역거부자들이나 여옥씨와 같은 연대활동가들이 좋은 학습효과를 낳았다고 봅니다. 병역거부가 소수자의 문제이고, 국가안보와 연결된 무거운 주제이고, 또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본인, 형제, 자손의 불이익을 반사적으로 유발하는 사안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인식이 긍정적으로 발전했지요. 

병역거부자는 계속 나오고 계속 감옥에 보내야하는 저로서는 절박한 문제이죠. 하지만 법을 바꿔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개정이 이루어지기 위한 사람들의 인식과 동의 수준은 어느 정도가 충분한 건지 고민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활동을 할 때 사람들의 인식개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제도개선에 주력해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도 있어요.

아마 병역거부자를 위해 대체복무제를 시행한다면 처음엔 상당한 충격이 있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 애국심을 유달리 강조하는 사회이니 더욱 그렇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소수자의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는 뜻을 가진 국민이 30%에 이르렀다면 법을 개정해도 좋은 상황이라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성동본 금혼규정의 위헌결정에 대해 처음엔 우리가 패륜적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하였지만, 정작 시행되고 나서는 별 문제가 없지 않았습니까.

고정관념이 가장 큰 장애물이죠. 중요한 것은 감정을 격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합리적으로 설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치의 영역이지요. 대체복무제는 지난 7-8년 동안 사회적 토론을 거쳤으므로 충격이 예상보다 크지 않을 겁니다. 국민 다수 역시도 감정적으로는 거부하지만 지성적으로는 수용하기 직전상태에 와있다고 봅니다. 나아가 이것은 심각한 인권침해의 문제이기도 하니, 현실의 인식보다 조금 앞서서 끌어가야 옳지요.

현재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도는 인권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총을 들 수 없다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다른 기회를 주지 않고 처벌로서 감옥에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체복무제가 시행된다면, 군대에 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군대의 의미와 평화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를 얻게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 전쟁을 준비하는 군대 대신에 우리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대체복무를 선택하는 사람은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젊은이들이 더욱 더 평화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되겠죠.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소수자의 권리 측면에서만 접근하면 평화권으로부터 조금 멀어지는 느낌이지만, 평화적 삶에 대한 선택권, 결정권으로 이해하게 되면 다시 포괄적 권리로서 평화권에 이르게 됩니다.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인권 문제를 넘어서서 지구적 차원의 평화운동으로까지 나아갈 테니까요. 아마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면 사람들은 항상 평화에 대해 고민하고 마음도 넓어지리라고 봅니다. 아마도 많은 연대활동가들이 이미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시 대체복무제 이야기로 돌아가는데, 그 가장 큰 걸림돌이 보수적 인사들이 말하는 양심검증 문제 같아요. 정말 ‘양심적’ 병역거부인지 어떻게 알겠냐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야당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하는 것에 대해 어느 여당 의원이 이런 말을 했죠. 정말 이 사람들이 국민을 위한다면 진정으로 그런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단전단수해서 한계상황에 두어야 한다고 했지요. 병역거부 토론에서 이러한 식의 발언을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지독한 불신과 증오의 표현들이지요.

남의 양심 내부를 송두리째 알아보고 검증해보고 싶어 하는 욕망을 정신의학적으로 무어라고 할까요. 집착이나 강박이라고 해야겠지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아는 자가 몇이나 될까요. 설혹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 하더라도 내면을 응시할수록 허망하고 끝없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하면서, 타인의 양심을 마치 악마의 대변인(advocatus diaboli)처럼 캐보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악마의 대변인은 가톨릭에서 성인심사에서 불가피한 악역이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가 병역거부자를 성인으로 추앙하기 위해 이러한 논쟁을 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처벌하기 위해서, 처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러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의 양심을 관찰하고 검열하고 표준화하고 강제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양심은 자기만 알 수 있죠. 한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그런 것. 뛰어난 기계장치로 인간의 생리화학적 반응을 죄다 포착할 수 있겠지만 그 추상인 양심은 탐지불가입니다. 양심은 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이러한 결단의 진지성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중세의 신명재판(ordeal)처럼 사람의 등에 바위돌을 얹어 죽기 직전까지 시험할 수도 없고 우물에 빠뜨려 살아나는지 봐가며 진정성을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결국 양심은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입니다. 오히려 정부가 합리적인 판정절차를 도입하고 기간, 난이도, 근무방식, 근무영역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서 대체복무가 현역보다 수월한 것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설계해야지요. 

결국 이 문제 때문에 대체복무제 도입이 더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요? 지금은 감옥이라는 것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양심’이 입증되는 상황인데,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더라도 양심을 검증하기 위해 그리스처럼 힘들고 긴 처벌적인 성격을 띤 대체복무제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대체복무제 도입 초기에는 다소 엄격한 처우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처음 국방의무를 뚫고 가려는 것에 대한 세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타협안을 병역거부자들이 모두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체복무제가 확립되고 나면, 상황은 호전되리라 봅니다. 독일처럼 우호적인 조건을 논외로 하더라도 최근 대만의 사례는 좋은 참조가 되겠지요.

대만은 처음에 너도나도 군대 안 가고 대체복무를 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대체복무자 정원제를 도입하고 기간도 상당히 장기로 설정하였지요. 그러나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1.5배(22개월 대 33개월: 2000년)에서 현재에는 1.2배 정도(12개월 대 14개월: 2008년)로 줄였습니다. 대만은 원래 이 문제를 인권의 시각에서 접근하지 않았죠. 군 개혁과 군 현대화의 목표아래 이 제도를 도입한 것입니다. 놀라운 발상이죠. 이명박 정부가 처음에 내세운 ‘실용’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군복무 중에 병역거부하는 문제인데요, 이라크 전쟁 중에 탈영하는 미군병사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모병제 아래서 학비나 시민권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대에 지원하고 훈련받고 그럴 때는 몰랐는데, 막상 이라크에 가서 총을 겨누고 실제로 전쟁상황을 겪어보니까, 이게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전역 신청을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못견디고 탈영하게 되는 것이지요.

모병제를 한다고 해도, 군인들 역시 양심적 결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죠. 모병제에서도 군인이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언제든지 전선에서 벗어날 자유가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많은 나라에서 군인에게도 병역거부권을 인정합니다. 인간의 양심은 ‘지금 이 순간’ 결단을 통해서 표출되니까 누구에게나 거부권을 인정하는 것이 논리적이죠. 최근에 이라크 전쟁과 관련하여 귀대를 거부한 군인이 처벌받은 사례가 우리에게도 있지요. 어떤 미군(예비군)은 이라크 파병 동원령을 받자 자살해버리기도 했지요. 병역거부자도 문제이지만, 이미 군인인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인권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군인인권법을 제정하자는 시민사회의 의견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어찌되었거나 그 사회의 인권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는 소수자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와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수자에게 과연 그 사회가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년 가을에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종교자유 보고서>에 기초하여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처벌 상황에 대하여 우려를 표했지요. 물론 미국은 전 세계에서 자유의 이름 아래 패권주의적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이지만, 전쟁국가인 미국조차도 각국에서 소수자로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상황을 그 나라의 자유의 시금석으로 삼는다는 거지요. 이는 자유에 대한 전통, 미국사회에서의 종교 중시 전통과 연결되어 있죠. 우리나라 종교인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려스럽지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 가톨릭신자, 개신교도, 불교도, 비종교인 할 것 없이 유사한 비율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겁니다. 관용이 아직 내면화되지 않는 종교. 걱정스러운 미래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이야기하려면 평화롭게 살려는 사람들의 양심부터 지지해줘야 하고, 아이들에게 평화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쳐야 하고, 평화를 선택하는 문화를 가르쳐야 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정치적 대표로 뽑아야 합니다. 우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가장 많이 처벌하면서 다른 나라에까지 평화를 말하고 전파하는 것도 어쭙잖은 일입니다. 평화와 관련된 권리를 집단의 권리라고 말하지만, 집단의 권리와 개인의 권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맞물려 있죠. 저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은 개인의 진지한 결단조차 옹호하지 못하면서나라 안의 평화, 나라간의 평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시대에 묻고 싶습니다. 저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이 우리사회에서 평화의 진원(震源)이라고 봅니다.


대담자: 여옥(전쟁없는 세상 활동가)-이재승교수(건국대 법대) 

정리: 한상봉(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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