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얼마 전에 만난 제 친구 하나가 자신이 경험한 일종의 빙의(憑依) 현상에 대해 체험을 나눠줬습니다. 지금은 그 증세가 사라져서 좀 평온하게 살고 있다고 하는데, 한창일 때는 자기가 느끼는 무엇인가가 근접한 미래(어떤 일이 벌어지겠다 싶으면 그날 벌어지는 식으로)에 일어나는 걸 보고 소름이 끼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언젠가 집을 내놓고 이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친구의 집으로 이사 오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미리 이삿짐 하나를 가져다 놓아도 되겠냐고 해서 받아줬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 친구는 일에서 돌아와 너무 피곤한 나머지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였는지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짐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나와서 천장을 타고 와 자기가 누운 소파 뒤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순간 몸을 못 움직일 정도로 놀랐고, 친구는 간신히 가족을 불러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렸습니다. 그리고는 이삿짐이라고 가져다놓은 상자를 열어봤는데, 이불이 들어있었답니다. 친구는 추정하기를 십중팔구 어떤 망자가 사용했던 이불을 그 집 식구들이 씻김굿 같은 걸 하고나서 무당의 지시대로 한 짓이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 짐을 갖다놓은 사람들에게 그 밤에 전화를 해서 그것을 당장 가져가게 했지만, 그 이후로 가까운 미래를 느끼는 이상한 능력으로 일상이 편치 않았던 삶을 친구는 제게 들려줬습니다.

▲ 마귀들에게 둘러싸여 고통 받는 성 안토니오의 모습을 담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그런 일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가까운 지인 하나가 귀신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해왔습니다. 친구에게서 들은 것도 있고, 아는 신부님 집안 사람들에게는 귀신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생각이 나서 ‘귀신,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일축해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속풀이 주제는 귀신에 대한 이해가 되어버렸네요.

사실 ‘귀신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입장에는 사후의 모든 영혼이 죽음과 동시에 사심판(私審判)을 통해 천국, 연옥 혹은 지옥으로 간다는 믿음에 근거를 둡니다. 그러니 이론상 사심판을 피한 소위 ‘미등록’ 영혼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심판은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영혼의 거처가 정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적으로 공심판(公審判)도 있는데 이것은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오듯이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산 이와 죽은 이를 모두 불러 세워 심판하시는 걸 가리킵니다.

자, 그러니까 죽으면서 사심판을 받고 연옥이나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야 하는데, 그 어느 곳에도 등록이 되지 않은 귀신처럼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존재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여름에 특별히 납량특집 <전설의 고향>을 시청했던 우리의 정서상 귀신은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변신하여 사람을 잡아먹는 요물 구미호처럼 위협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사람들을 무섭게 하기 때문에 악마들처럼 교묘하게 유혹하는 면도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혹자’의 면모를 겸비한 사탄과는 구별되는 영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구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바라보는 악마와 우리에게 익숙한 귀신들에 대한 견해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신앙에 바탕을 두고 귀신에 대해 가장 단순하게 이해하는 방식은, 비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죽으면 하느님을 몰랐기 때문에 처소가 결정되지 못한 채 떠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영혼은 사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시각은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함이 신자들에게만 미친다는 한계를 가지기에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에 비해 귀신을 타락한 천사로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 시각은 루시퍼와 그 패거리 같이 하느님을 배반한 천사들이 육체가 없이 땅에 던져진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이 육체 없는 존재들을 귀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서상, 이 타락한 천사들은 어째 악마(Diable)로 보일뿐, 위에서 말한 귀신(Demon)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즉, 후자는 사람을 무섭게는 하지만 해할 정도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고 전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양 문화와 곁들여 보자면, 귀신은 악인이 죽은 뒤 지옥에 떨어진 영혼을 사탄들이 이용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시종일관 악하게 살아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단 한 번도 따르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가 죽어서 갈 곳은 지옥입니다. 죽은 영혼은 모두 사심판을 거쳐서 거처가 갈린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지옥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끝끝내 거부한 이가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가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온 영혼의 신상명세와 이름 등을 악마들이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일을 방해하고, 공포를 조장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지옥에 온 영혼들의 정보만 이용하는 것인지는 장담 못하겠습니다. 오늘의 맥락에서 보면, 사람들의 개인정보를 빼내서 보이스 피싱하는 사람들과 흡사합니다. “고객님, 당황하셨죠? 해결을 원하신다면 이런저런 일을 해 보세요” 하며 우리를 두려움으로 인한 혼란으로 빠뜨리는 움직임입니다. 신앙의 맥락에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동떨어지도록 이끄는 움직임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 하나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만한 설명은 없습니다. 대상들이 초자연적인 영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종종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수준과 만납니다. 그러나 중요한 기준은 이 영적인 움직임이 결국 나를 하느님과 만나게 하는지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그분을 점점 더 멀리하게 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

‘귀신’이라는 주제는 오랜 세월동안 그런 정신문화를 이어온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줄기차게 제기됩니다. 따라서 단순히 그리스도교적인 관점만을 수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정신문화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민간신앙은, 사람의 몸에 혼(魂), 백(魄), 귀(鬼), 이렇게 세 종류가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에 오르고, 백은 땅에 들어가고, 귀는 그 중간에서 떠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셋 중에 귀는 산 사람으로부터 충분히 제(祭)를 받으면 원이 풀려서 자연히 없어지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산 사람에게 들어간다고 합니다. ‘인귀(人鬼)’, 쉽게 말해서 사람이 신들리는 현상이 이렇게 벌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한국가톨릭대사전, ‘귀신’ 항목 참조). 이 경우의 해결사는 전통적으로 무당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 귀신, 즉 악마가 조종하는 영혼(악령이라 하겠습니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마 예식 같은 게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 번 떠나간 귀신이 다시는 안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길을 마다하고 다른 유혹에 빠질 때는 언제나 귀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두려움에 휩싸일 때는 내버려두지 마시고 성호경을 바치고 나서 단호하게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악령아, 물러가라!”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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