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윌래완 새티에 제17회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자

“한국의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이 태국의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질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상을 받게 되어 정말로 기쁘고, 영광입니다.”

윌래완 새티에 태국 노동자연대위원회 부의장이 큰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봉제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태국 내 노동조합 다수와 노동운동 단체들의 연합 조직을 이끌고 있는 그는 지난 11일 제17회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수상했다.

▲ 제17회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수상한 윌래완 새티에 태국 노동자연대위원회 부의장 ⓒ한수진 기자

1956년 태국 북동부 콘켄에서 가난한 농부의 맏딸로 태어난 윌래완 부의장은 그 시절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이 그러했듯 18세에 돈을 벌기 위해 수도 방콕으로 상경했다. 공사장 일용직, 식당 종업원, 가사 도우미 등 다양한 일자리를 거치다 나일론 양말 공장에 취직하면서 그나마 안정적인 직장을 얻게 됐다. 그러나 취업을 했다는 안도의 한숨도 잠시. 차차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정의나 평화 같은 단어가 사치일 수밖에 없는 열악한 노동 현실이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해고되는 일이 많았어요. 그건 옳지 못한 일이었죠.”

윌래완 부의장은 동료를 따라 노동자 공부 모임에 참여하면서 노동자들이 부당해고와 같은 불합리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 그가 조합원이 되고, 노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노조 활동으로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을 접하면서 시야는 더 넓어졌다. 노동자인 자신과 동료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으려면, “한 공장의 문제만 해결할 것이 아니라 전체 태국 노동자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했다.

윌래완 부의장은 1984년 자신이 일하던 공장이 위치한 옴노이옴야이 공단 내 다른 노조들과 연대해 ‘옴노이옴야이 노동조합 연합’을 설립하고, 노동자센터를 열었다. 이어 1990년 사회보장법 제정 요구 단식 농성, 1992년 모성보호제도 개선 운동, 1993년 옴노이옴야이 공단 내 장난감 공장 화재로 인한 노동자 인명피해보상 요구 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련의 활동들은 사회보장법과 모성보호법 제정, 90일 유급 출산휴가 쟁취,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 제정 등을 통해 태국 노동자 복지정책의 뿌리를 마련하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그를 전국 단위의 노동운동가가 되도록 이끌었다. 윌래완 부의장은 지난 10여 년간 여성노동자연합과 태국 노동자연대위원회 의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는 “활동 경험이 쌓이다보니 그리된 것”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던 태국 노동운동계에서 여성 노동자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노동자들의 신뢰까지 얻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태국의 많은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그를 자신의 ‘롤모델’로 꼽는다고 한다.

▲ 사회보장법 개혁과 관련한 노동자들의 요구안을 정부에 전달하는 윌래완 새티에 (사진 제공 / 지학순정의평화기금)

최근 윌래완 부의장이 집중하고 있는 이슈는 사회보장법의 확대다. 1990년 학생과 노동자의 연대투쟁으로 힘겹게 얻어낸 사회보장법은 노동자 본인과 1~12세 자녀의 의료보험을 제공하고, 퇴직 후에는 연금을 보장하는 노동자 복지정책이다. 법의 적용 대상 범위를 현재의 정규직 노동자에서 농민,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으로 넓히고, 자녀의 대상 연령도 12세에서 20세까지 확대하는 것이 개정 운동의 주요 내용이다. 윌래완 부의장은 대상 범위가 확대되면 태국 인구의 절반이 조금 넘는 3천 8백만 명이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윌래완 부의장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여성과 농민, 아동, 이주민 등 소외받고 가난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묻자 “노동자의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할 수 없다”는 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노동자는 일하는 동안 공장에 있지만, 퇴근 후에는 지역사회와 가정에 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장을 벗어나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벌이는 활동은 한 공장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여러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함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제가 사는 지역에서 동료들이 운영하고 있는 소액대출사업이 그 중 하나에요. 급하게 돈이 필요한 노동자들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활동이죠. 갑자기 해고를 당해 생활비가 없거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 노동자들이 은행이나 대부업자에게 높은 이자로 대출을 받아 큰 부담을 지는 일을 방지할 수 있어요.”

윌래완 부의장과 같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노동자의 기초 생활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여러 제도가 만들어졌지만, 수십 년이 지났어도 고용불안과 저임금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숙제다.

“최근 공장 폐업과 생산 라인 축소가 증가하면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내세우는 이유는 비용이에요. 임금이 너무 높다는 거죠. 그리고는 미얀마 국경과 가까운 지역에 공장을 열어 미얀마나 캄보디아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를 고용하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최저임금 이하의 급여를 줄 수 있거든요.

사실 최저임금도 실제 물가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요. 현재 최저임금이 하루 300바트(약 1만 원)인데, 물가는 계속 치솟고 있거든요. 최근 몇 년 사이 볶음밥 가격은 2배가 올라 40바트나 해요. 가족을 부양하기엔 불가능한 액수죠.”

윌래완 부의장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한국 노동자들에게도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노동자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계속 싸워나가고 변화를 꿈꾼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더 나아질 것이다”고 말했다. 그의 당부는 한 나라의 노동운동을 이끄는 지도자이기 이전에, 37년간 쉼 없이 공장 작업대 앞을 지켜온 노동자가 땀방울로 지은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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