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지학순 주교 영성은 닮은꼴" 주장
지학순 주교, 가장 인간적 삶을 통해 사제적 삶의 모범이 된 사목자

지학순 주교의 사목 활동과 영성을 살피고, 그것이 오늘 날에 던지는 메세지를 되짚어 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 12월 14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예수회센터 성당에서 지학순정의평화기금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공동 개최한 세미나 '오늘의 빛, 지학순 주교'가  170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세미나에는 조현철 신부(예수회),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황종렬 박사(두물머리복음화연구소)가 발제자로 참여해, 각각 ‘프란치스코 교황을 통해 본 지학순 주교의 삶과 영성’, ‘지학순 주교의 사목교서에 나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 ‘지학순 주교의 평신도 운동’ 등을 주제로 발표했다.

▲ (왼쪽부터) 조현철 신부, 이동화 신부, 황종렬 박사 ⓒ문양효숙 기자

첫 번째 발제를 맡은 조현철 신부는 영성을 ‘궁극적 가치와 목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주는 실천적 힘의 원천, 혹은 삶의 근본 의미 혹은 목적과 관련된 행동양식’이라 정의한 뒤, 지학순 주교를 “세상 한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고 실천한 사목자”로 소개했다.

지학순 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대로 ‘실험실’이 아니라 생생한 ‘현장’에서 가난한 이들을 만났는데, 조현철 신부는 일화를 통해 지 주교의 삶과 영성에 접근했다. 특히 조 신부는 지학순 주교의 일상에 주목하면서, 하루에 삼백 원씩 ‘삥땅’을 쳤다고 고백한 시내버스 차장에게 ‘그것은 죄가 아니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 결론 내린 일, 노동자들이 방문하면 언제든 회의를 중단하고 이들을 먼저 만났던 일, 회갑연 축의금을 원풍모방 노조원들에게 몽땅 내준 일 등을 거론했다.

또한 1960년대 시작한 신용협동조합 운동과 노년에 관심을 쏟은 사회복지, 1969년 원주 문화방송 개국과 관련한 부정부패 규탄 대회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구속 사건 등을 함께 언급하며, 이 모든 것이 “힘없는 이들에게 다가가 기꺼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려는 연민의 구체적 실천”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현철 신부는 이러한 지학순 주교의 삶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요청에 충실히 응답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과 요건을 제시”하였다면, 지학순 주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걸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지학순 주교는 “가장 인간적인 삶을 통해 가장 사제적인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동화 신부는 지학순 주교의 사목활동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어떤 연관이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폈다. 이 신부는 먼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사목헌장> 등에서 드러난 교회론과 사목, 신학적 방법론의 변화를 언급했다.

“공의회 이전에 교회는 스스로를 국가와 대립되는 또 다른 조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조직형태와 법률 등을 강조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교회를 제도나 법률보다 ‘공동체’로 이해하고자 했다. ···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느님의 공동체인 것이다. ···공의회가 바라보는 사목이란 인간에 대한 봉사로서, 인류에 대한 연대성과 존경과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다. 때문에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서도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지만, 마찬가지로 정치적·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서도 소홀할 수 없다. ···신학적 방법론 또한 교회전통의 추상적 이론에서 출발해 현실로 들어가는 연역적 방법이 아니라 세상에서 시작하는 귀납법으로 전환했다.”

1956년부터 59년까지 로마 우르바노 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지학순 주교는 1965년 주교 서품을 받고 그해 9월부터 세 달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 4회기에 참석했다. 이동화 신부는 지학순 주교가 “공의회가 가르치는 교회와 사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 14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예수회센터에서 지학순 주교의 삶과 영성을 살피는 세미나가 열렸다.ⓒ문양효숙 기자

이 신부는 지학순 주교가 강론집 <정의가 강물처럼>(1983, 형성사)에서 벨기에 신학자 스킬레벡스의 문서를 인용해 언급한 ‘교회의 비중심화’에 관해 설명했다. 공의회 정신의 다섯 가지 ‘비중심화’는 ▲ 교회, 교황, 사제에게 두었던 중심을 그리스도께 옮기는 ‘교회의 비중심화’ ▲ 교황청이 아닌 각 지역으로 향하는 ‘로마의 비중심화’ ▲ 평신도에 중점을 두는 ‘성직자 비중심화’ ▲다른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로 향하기 위한 가톨릭 교회 스스로의 비중심화 ▲세계와 인간의 문제로 향하는 ‘교회 내적 관심의 비중심화’ 인데, 지학순 주교는 이를 바탕으로 “오늘의 교회가 ‘교회는 인간의 영혼을 구하는 일에만 힘쓰면 된다’고 생각하고 사회문제에 대하여 전연 외면하고 있다면 교회는 인류 앞에 하나의 골동품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라 지적했다.

이 신부는 “지학순 주교의 사목에서 가장 뚜렷한 방향은 ‘사회정의 구현’이었으며, 이는 1972년 사목교서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1972년 사목교서에서 지 주교는 한국사회 위기의 원인을 정권의 정보통치, 부정부패특권, 외세 의존이라 분석하고, 언론과 출판, 신체와 집회 결사의 자유, 학원과 종교의 자유 등 기본적 자유권과 생존권 쟁취를 위해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이동화 신부는 “대사회적 측면에서 지학순 주교의 가장 뚜렷한 방향성이 정의구현이었다면, 교회 안에서 가장 근본적인 방향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였다”고 설명했다.

지학순 주교는 1973년 사목지침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에서 가난한 이들을 조직하고 학습시켜 협동조합 활동을 전개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각 본당 사제와 본당 단체 지도자들이 본당과 공소에 등록되어 있는 가난한 교우들의 실태를 조사하는 등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지 주교는 이 사목지침에서 “교리교육과 활동방법교육이 통일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며 신앙과 실천이 하나 되는 교리교육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사회정의에 관한 내용으로 이뤄진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1973, 분도출판사)를 선택해 함께 읽고 토론하는 교육 방법에 집중 했다.

이 신부는 이와 같은 지학순 주교의 활동이 교회와 사목을 새롭게 이해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노선을 충실히 따른 것이었으며, 가난한 이들의 자립과 의식화를 위한 공동체 운동을 중심적 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단 총회의 결의에 비길 수 있다”고 말했다. 공의회의 대전환에 대한 지역 교회의 구체적 응답이었던 라틴아메리카 주교단의 <메델린 문헌>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와 불의에 대항하는 그리스도교적 투쟁 등 구체적인 사목 실천을 제시한 바 있다. 이동화 신부는 “비록 지학순 주교의 사목이 한국교회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으나, 공의회의 노선에 직접적으로 응답한 예언자적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문양효숙 기자

마지막 발제를 맡은 황종렬 박사는 ‘평신도의 공의회’라고 일컬어질 만큼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에 주목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과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등의 문헌을 살피고, 이 공의회의 정신을 따라 지학순 주교가 어떻게 평신도가 능동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열고자 했는지 설명했다.

“지학순 주교는 평신도들에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교육하면서 평신도 역할 수행과 능동적 참여를 지속적으로 강조했고, 이를 자신의 사목 실천에 통합했다. 원주교구는 이영섭 신부를 중심으로 초대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장화순, 1965년 이래 지 주교의 복음화의 동반자였던 장일순, 1967년부터 교구 기획실장 등을 맡았던 김영주와 최규창, 이경국 등 청년들이 교구 사도직과 복음화에 동참했다.”

1972년 장마로 홍수가 발생해 14만명 이상의 수재민이 발생하자 지학순 주교는 유럽 까리타스 등 외국 원조기구에 도움을 요청해 지원을 받는 한편, 교구뿐 아니라 강원, 충북 지역 인사를 망라한 ‘원주교구 재해대책 사업위원회’를 구성했다. 지학순 주교는 이 재해대책사업이 단순히 물질 지원을 넘어서 수재민들을 조직하고 학습시켜 새로운 협동 조직 활동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는 1973년 사목지침과 사목 세부지침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황 박사는 “이 사목지침에서 지 주교는 사제의 역할을 지역 살림의 복음적 수행으로 명기하고 신자 뿐 아니라 지역 사회 시민들과 함께 하는 사목을 강조했다”며, “협동 조직은 교우를 골간으로 하여 조직하되 부단히 교우 아닌 일반 근로 대중을 열정적으로 흡수, 조직해야 한다”는 사목지침을 소개했다. 지 주교는 이를 위해 교구 청년회가 교구와 본당, 지역사회를 이어줄 것을 요청하면서 청년회 활동의 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청년회는 이제까지의 그 조직과 활동에서 나타난 형식주의, 추상성, 산만성, 오락주의 형태와 근로 대중의 눈에 무위도식배로 보일 수 있는 일체의 좋지 못한 경향들을 뜯어 고치고 청년 크리스챤다운 건실성과 활동적이고 투사적인 기백, 민중에 대한 겸허하고 소박한 애정과 활동의 조직성 등을 배어야 한다”(1973년 사목지침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 가운데 ‘협동조직 활동’ 10항) 는 것이다.

황 박사는 “지학순 주교는 평신도가 놀 수 있도록 멍석과 같은 바닥이 되어 주셨다”면서 동시에 지금 주목해야 할 것은 지학순 주교의 행적 자체가 아니라 “지학순 주교가 함께 열었던 평신도 사도직을 지금 구현할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끝으로 황 박사는 “사도직을 설계한다고 다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이상일 뿐’이라 말하는 사람에게는 설계조차 나오지 않고, 설계가 나오지 않으면 그렇게 살 가망성은 더 희박해진다”며 “‘이상은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사람만이 조건에 맞는 그림을 그려갈 수 있다. 지학순 주교는 이를 그려갔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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