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이달이 위령 성월인지라 이런 주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지는 듯합니다. 지난주 교회상식 속풀이에서 잠시 ‘통공’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느님 곁에 계신 성인들과 함께 기도를 통해 일치로 나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 드리는 독특한 방식의 기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오래 전부터 ‘연도(煉禱)’라고 불러왔습니다. 요즘에는 ‘위령 기도’라고도 부르지만, 여전히 ‘연도’라는 용어도 널리 통용되고 있습니다. 뜻은 한자 의미에 드러나듯이 ‘연옥 영혼들을 위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성당 신자 분이 돌아가셨을 때, 빈소에 들러보신 분들은 모두 아실 겁니다. 한국의 천주교는 연도를 통해 다른 종교와는 다른 형식의 장례 풍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빈소에 오신 신자 분들(특히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시편 기도를 주고받습니다. 시편 구절이 서로 오갈 때, 그것을 그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창을 하듯 구성진 가락으로 “읊어” 나갑니다. 즉, 선 소리[先唱 : 계]와 후 소리[後唱 :응]가 서로 노래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광경을 아직 접하지 못한 분들은 옛날 선비들이 몸을 가볍게 흔들면서 사서삼경을 읽으며 내는 소리를 상상하셔도 좋고, 라디오 프로그램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에 나오는 민요 가락을 떠올리셔도 좋습니다. 어떤 분들은 연도 노래의 박자와 강약이 상여꾼들이 발을 내딛는 속도와 관련 있다고 설명하시기도 합니다.

시편 기도문에 화음이 들어가지 않은 단성의 가락을 붙여 창을 하듯 노래하는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외래 전통을 우리 문화 안에 받아들이며 만들어낸 독특한 예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 소리와 후 소리가 나뉘어 노래하는 것은 수도원에서 성무일도를 바칠 때 해오던 방식입니다만, 가락 안에 우리 고유의 색이 강한 까닭에 가톨릭 예식 중 가장 잘 토착화된 것이 연도라고 꼽을 만합니다.

토착화가 의미하듯이, 위령 기도 자체는 우리의 독보적인 예식은 아닙니다. 유럽에서도 시편을 토대로 짜인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있고, 이 기도가 우리나라 천주교 초기의 선교사들(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을 통해 수입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유럽에서 하는 이 기도문은 성무일도의 아침, 점심, 저녁 기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인호칭기도는 없습니다. 반면에 연도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시작 기도를 하고 나서는, 시편 63 · 130 · 51편을 이어서 노래로 하고, 성인호칭기도도 노래로 하며, 찬미와 간구 역시 노래로, 그리고 주님의 기도마저 노래하고, 마침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연도 열심히 하고 나면, 허기집니다.

고등학생 시절, 소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초상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처음으로 연도라는 것을 해보게 되었는데, 너무 어색하여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선배들이 버티고 있지 않았으면, 그냥 대략 기도문을 읽고 말았을 것을 꼭 정식대로 흉내라도 내보고 싶어 하는 선배가 있어서 매우 어설프게 따라했었지요. 그런데 그 첫 단추의 경험이 이후 초상집에 들렀을 때, 상례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게다가 사람의 임종을 돕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언젠가부터 이해하게 되었고, 나이가 들수록 그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달아 갑니다.

이 땅에서 천주교가 시작되던 무렵 초기에는, 제사가 미신이니 행할 수 없다는 교회의 판단으로 속앓이를 했지만, 우리의 조상들께서는 매우 지혜로웠다고 여겨집니다.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고 그들과 그들 가족들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사실상 제사의 다른 형식을 열어놓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는 제사를 문화의 일부로 인정하게 되었고,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조상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고, 연도를 바침으로써 가톨릭적인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 입관, 출관, 하관 등 상장예식을 통해서 말이지요. 1864년에 <천주성교예규>라는 책이 발간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상례에 쓰이는 기도문이 수록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성인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지만, 우리의 청원에 대해 전구해달라고 성인들께 부탁하는 것을 기복신앙적 태도로 보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충분히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문제를 알리고 도움을 청하려는 자연스런 마음을 함부로 말리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다음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면 좋겠습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3-14)

위의 복음 구절에서 나오듯, 현세에서 함께 살고 있는 힘없는 이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과 먼저 가신 의인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혹은,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바로 의인처럼 여기고 계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현세의 내 행동에 대해(내가 그것에 대한 보답을 원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알아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연도가 되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가 의인들의 부활 때 보답 받게 되리라는 것은, 봉사를 통해 가난한 이들이 살고 있는 현세와 의인들의 내세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정리해 보면, 연도는 그런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봉사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대표적으로 죽은 이의 가족) 곁을 지켜주고 그들을 돕는 봉사 행위도 됩니다. 제 지인의 집안 어르신 중에는 이 아름다운 예식을 경험하고, 그 봉사에 매료되어 가톨릭 신앙을 찾게 된 분도 계십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생겨난 상조 회사들의 세속적 상혼과는 관계없이, 이 예식이 꾸준히 교회 공동체(지상과 천상)를 결속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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