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아이를 키우면서 하는 각오가 있다. 내가 저 아이의 인생을 살아 줄 수 없다는 것이 하나, ‘친구 같은 엄마’가 아니라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이 또 하나다.

아이의 인생을 살아 줄 수 없으니 너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참견과 간섭은 안 할 것이며, 친구가 되겠다는 것은 ‘친구 같은 엄마’란 말 속에 있는 엄마의 성격, 지위, 권위마저도 놓겠다는 뜻이다. 친구처럼 지내는 건 좋지만, 엄마로서 딸에게 해줄 것은 해줘야 한다는 사회의 관습에 대해서도 저항하고 싶다는 간곡한 바람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을 각오라고 부르는 건 부모, 자식의 관계가 평등할 수 없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은근히 강력한 탓이다. 특히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엄마의 몸을 통해 이루어진 관계이다 보니 ‘소유’의 관계―‘헌신’이라는 말로 포장되곤 하는―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같다.

얼마 전 한 청소년 활동가들의 모임에 갔다가 ‘모태 전교조’라는 말을 들었다. 엄마가 전교조 조합원인 선생님이었고, 아이가 자라는 동안 자연스럽게 전교조 활동을 하는 엄마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 아이도 자라면서 청소년 활동가가 되었는데 부모의 영향을 꽤 받았을 테지만, 부모와는 또 다른 가치관을 갖고 활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활동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모태 신앙’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모태 신앙이나 모태 전교조나 아이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부모의 가치관과 신앙에 대해 아이가 비판 의식을 가질 틈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현상들을 증언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신앙심이 깊고 영성의 깊이가 깊어 생활 그 자체에 가식이 없고, 가난한 이들의 참된 친구였던 예수의 제자마저 될 만한 풍모를 지닌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대부분 부모의 신앙생활과 현실생활 사이의 괴리감, 그 배신의 거리에 절망하고 심지어 부모를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배신감과 조롱은 ‘모태 전교조’만이 아니라 진보적이라고 하는 어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386 부모를 둔 한 청년도 자신의 부모가 “나도 옛날에 다 해봤는데…” 어쩌고 하면서 정작 세상 속의 성공에 무신경한 자신을 설득하거나 윽박지를 때마다 씁쓸하다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부모에게 마음과 행동의 완벽한 일치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마음이 신앙이든 사상이든, 어떤 가치관이든 간에 사실 살아간다는 것은 적당히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만 신앙심을 갖거나 양심적이면 된다는 마음들이 ‘원칙’, ‘도리’ 같은 것과 벌이는 사투쯤 되지 않을까?

ⓒ한상봉 기자

모태 신앙이 성당 다니는 사람들에게 큰 의미 부여가 되는 이유는 아마도 ‘성가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그 성가정의 고단한 사연들은 외면하고, 그저 예수가 태어난 가정이라는 성스럽고 따스하고 멋진 이미지만 취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말이다.

성가정의 아버지 요셉은 누구 자식인지도 알지 못하는 애를 임신하고 돌아온 약혼녀를 받아들인 고독하지만, 의리 넘치는 사내가 아닌가. 한국 남자들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용기를 내준 사람이니 성가정의 일원이 될 만하다. 마리아는 어떤가? 남편인 요셉에게 설명할 수 없는 임신을 했고, 아이를 한겨울 허름한 마구간에서 낳은 것도 모자라 그 아이 때문에 여기저기 떠도는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그 녀석을 장가도 못 보내고 욕된 십자가에서 죽는 꼴을 목격한 어머니였다. 아들 예수야 말할 것도 없고….

어찌 보면 성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요셉, 마리아와 예수가 감당하고 받아들였던 것들, 그 모든 어려움과 곤란을 감수했던 성가정의 고난의 시간을 끝없이 우리도 함께하겠다는 각오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한국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온화한 표정의 세 사람을 그리고 조각한 성가정상이라는 이미지만 남긴 채 소비되면서 그저 신자만 되어 달라고, 신자가 되었으니 혼인성사는 꼭 성당에서 하자고 남편과 아내, 아이들을 다그치는 이상한 힘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이상야릇한 힘 때문에 사람들은 자녀에게 유아세례도 해주고, 1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 첫영성체 교리도 함께 버티고, 어떤 집 아들은 사제로 봉헌한다면서 신학교에 보내고, 하다못해 자녀들을 성당에서 혼배미사로 출가시키고 싶다는 소망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에게도 신앙을 선택할 자유, 삶의 가치관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나도 유아세례를 받았고, 오랜 냉담 끝에 성당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것을 ‘유아세례의 은총’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지만, 내 아이의 신앙 문제를 생각해보니 아이에게 질문마저 하지 않는 유아세례란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가 싶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만, 성당 직원이기 때문에 ‘네 딸에게 유아세례 안 시키느냐, 둘째는 안 갖느냐’는 온갖 간섭과 오지랖에 시달려야 했다. 성가정을 꾸리고 말고는 나와 우리 가족들의 의사일 텐데, 성가정에 대한 강박감이 내 자식이나 내 주변 사람들 모두, 그리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성당 직원들도 그래야 한다는 간섭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모태 신앙이나 유아세례만큼 고민하게 되는 것이 혼인성사다. 어떻게든 성당에서 결혼을 시키고 싶은데 바쁘다면서 시간 내지 않는 자녀들을 위해 부모들은 정말 절실하게 사무실에 와서 묻고 또 물으신다. 자기 자녀가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자녀의 배우자가 될 사람을 압박하는 일마저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나보다 먼저 결혼한 여동생이 결혼을 준비 중일 때의 일이다. 동생의 시어머니인 사돈어른이 얼마 전에 세례를 받으셨다며,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동생은 오랫동안 성당을 나가지 않고 있는 소위 ‘냉담 신자’였고, 나도 다시 성당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시어머니의 요구에 난감해하는 동생을 위해 내가 다니던 성당의 청년 담당 사제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의견을 구했더니, “부모님이 결혼하는 게 아니니까 본인들이 혼인성사를 원하는지에 따라 결정하는 게 가장 좋다”는 해답을 주었고, 이 사제의 한마디로 동생은 곤란한 입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결혼 준비를 하게 되었다. 사돈어른은 사제의 말이라니 아쉽긴 해도 토 달지 못했고, 동생은 은근한 혼인성사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다.

이 일을 겪은 덕분에 성당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자녀들의 혼인성사에 관해 고민스러워하는 부모들과 얘기할 때마다 “부모님들이 아니라 자녀들의 일이니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세요”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곤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강요하는지 묻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특히, 교회에서 묘하게 급진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가족 구성원 안에서도 다양한 요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진정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가장 가깝게 지내는 가족일수록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하다. 어떤 관계든 밀착되어 있을수록 생길 수 있는 피로감을 없앨 수 있는 시공간적인 거리가 필요하니 말이다. 단지 함께 신자이기를 강요하기보다 어떤 내용의 삶을 살 것인지 먼저 공감하고 살아가다 보면 주변 사람들은 그 삶의 모양새를 보고 강요하지 않아도 어떤 길이든 선택하기 마련임을 믿어주는 것. 그것을 성가정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좋겠다.
 

림보 (필명)
장래희망 있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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