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노동청년 창립 50주년 기념 연속 기획 인터뷰]


 큰 바늘이 순식간에 손가락에 박혀

"초등학교 4학년 때 첫영성체를 했는데, 그땐 우리 또래들이 성당에 살다시피 했어요. 동네에 놀이터가 달리 없었던 터라 하루 중 반나절은 성당에서 수녀님과 함께 보내곤 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성당에서 내 자리가 없어져버렸어요.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기에 학생 미사에도 못 가겠고......, 더구나 공장에서는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에 쉬게 해주었는데, 그나마 철야 근무가 많아 쉬는 일요일에도 아침 7시에나 퇴근하곤 했어요. 그렇게 공장에 다니는 동안 매주일 미사를 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점차 멀어져 갔어요."

박주미, 그녀가 노동현장에서 JOC운동을 이끌어가던 시대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스스로 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장으로 가 노동자의 삶을 걸었던 그녀는 1974년 3년 7개월을 다녔던 메리야스 공장에서 태화고무로 자리를 옮겼다. 태화고무는 당시 2만 여 노동자가 일하는 대규모 생산현장이었다. 큰 공장에 가야 월급을 더 받을 수 있을거란 생각에 나이를 한 살 속이고 미싱 기술자로 들어갔다. 열일곱 살이라고 하면 무시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땐 미싱 시다들도 18-19세가 대부분이었다.

미싱 기술자이긴 했지만 신발공장에서 하는  일은 그전까지 하던 업무와 많이 달랐다. 천에 박음질하는 것이 아니라 두꺼운 가죽에 박음질을 하는 것이라 바늘도 두텁고 박음질을 하는 데 힘도 많이 쓰였다. 그리고 어떤 미싱은 키가 높아 다리가 닿지 않기도 했다. 어린 손으로 하기에는 벅찬 일들을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하면서 점차 기술을 익혀나갔다.

“미싱 사고도 많이 났었어요. 자칫 잘못하면 그 큰 바늘이 순식간에 손가락에 박혀버립니다. 미싱 바늘이 손가락을 관통하면 대개 당황해서 손을 빼내는데 그러면 손가락 살이 찢어집니다. 나는 의외로 침착했던지 손가락에 바늘이 박혔을 때 가만히 있었어요. 그러면 기술자가 와서 노루발을 분해해서 바늘을 빼주고 상처를 치료해줍니다. 물론 겁이 나고 무서웠죠. 그런 일들이 가끔 일어났어요.”

공장이 워낙 커서 점심시간에 화장실에 다녀오면 식당에 줄이 늘어서 있어 점심을 굶는 일이 다반사였단다.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공부에 미련을 버리기 못한 탓에 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고나 할까, 그녀는 그렇게 점심시간에 줄을 서서 밥을 먹는 대신 책을 택했다. 소설책과 에세이집도 많이 읽었다. 별로 말이 없고, 시간만 나면 책을 읽던 그녀의 이미지는 ‘조용하고 일 잘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투사가 됐다. 1978년 JOC를 만났고, 그녀의 삶이 변했다. 어쩌면 말없이 미싱을 돌리면서 틈틈이 책을 읽던 그녀 안에 이미 노동자운동의 싹이 트고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야학과 JOC 운동으로 세상에 눈떠

“책을 읽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이대로 안되겠다 싶어 검정고시 반에 등록을 했어요. 여섯 시부터 수업이 시작되는데 퇴근은 일곱 시예요. 일주일에 세 번은 잔업을 하니 공부를 할 수 없더라구요. 그래서 검정고시 학원을 포기하고 통신중학교 등 독학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어요.”

성안교회 청년회에서 야학을 한다고 해서 찾아갔다. 때마침 교육안을 짜고 있었다. 그녀에게 의견을 묻기에 영어와 수학을 배우고 싶다고 강하게 피력했다. 그러면서 그녀 스스로도 놀랐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엇 하나 자기 주장을 남 앞에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야학 선생이 공장을 다니면서 왜 어려운 영어와 수학을 하려느냐고 물었다. 당시 대부분 야학은 노동 야학으로 근로기준법 같은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박주미씨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학과 공부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공부하고 싶은 열정으로 야학에 다니더니 어느새 그녀는 학생 대표처럼 돼 버렸다.

야학을 통해 그녀는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당시 강학이라고 불렸던 야학 선생들은 대학생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런 강학을 보면서 그녀는 ‘참 훌륭한 청년들’ 이란 생각을 했다. 훌륭한 뜻을 품은 강학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야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박주미씨는 그 강학들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이 자기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훗날 그녀 역시 강학이 되어 교단에 서서 후진들에게 배움을 나누어 주었다.

동일방직 사건을 다룬 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의 한 장면. 동일방직 근로자들은 당시 하루 14~15시간을 솜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며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일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1분에 140보’라는 구호를 붙여놓고 빨리 걷는 연습까지 했다. 주위에서는 ‘수출역군’이라고 추켜세웠지만 월급은 불과 70원. 자장면 한 그릇을 사먹을 수도 없고 남자 직원들의 절반에 불과했다.

한국경제는 1970년대 후반까지 연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지속해왔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해야 했다. 10만 원 이하 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60%를 넘었고, 주당 노동시간은 50시간을 넘었다. 세계 최악이었다. 그러한 것들은 외형적 성장의 그늘이었지만 당시 군사독재 정권은 1971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제한한 데 이어 1973년과 1974년 두 차례 노동법을 개악하여 단결권마저 제한했다.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 노동현장의 딸들이 일어섰다. 동일방직·반도상사·원풍모방·YH무역·콘트롤데이타·한일공업·청계피복 등의 노동자들이 조직적인 투쟁을 시작했다. 특히 섬유와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한 여성 노동자들의 활약은 가히 ‘딸들의 반란’이라 일컬을 만했다. ‘나체시위’와 ‘똥물투척’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동일방직 노조 사수투쟁은 1970년대 노동운동의 특징과 면모를 잘 드러낸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부산에서도 동일방직 기도회가 열렸다.

“부산 중부교회에서 처음으로 기도회가 열린다고 강학이 함께 가자고 했어요. 교회 앞에 전경들이 지키고 서있어 무서운 마음이 들어 계단을 뛰어올라갔는데, 전경이 뒤쫒아 오는거예요. 후들거리는 다리로 교회에 들어서니 정작 몇 사람밖에 없더라구요. 사람들이 못 들어온 겁니다. 조화순 목사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공항에서 출발조차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결국 기도회는 무산됐지만 아마 그때 내 안의 투사적 기질에 불이 켜진 게 아닐까 싶어요.”

그녀는 그곳에서 “정부는 지오쎄(JOC)를 탄압하지 말라” 라고 쓰인 유인물을 봤다. 그녀 언니가 JOC 활동을 했던지라 낯설지는 않았지만 기도회 현장에서 만난 ‘JOC’라는 글자는 그녀에게 다른 울림을 주었다. 그 무렵 신앙의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고 그녀는 되뇌인다.

사람의 아들 예수, 노동자를 구원하시는 이름 안에서

가톨릭 노동청년회. 그 말의 울림은 곧바로 동일방직의 그 노조 구성원들이 가톨릭노동 청년회 회원들이라는 것과 자기 언니가 가톨릭 노동청년회 활동을 하는 것, 그리고 그녀 자신이 가톨릭신자라는 것과 맞물려 스스로 JOC의 문을 두드리게 했다는데, 1978년 12월 가야성당 JOC를 찾아가니 회원이 스스로 찾아오기는 처음이라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어릴 때 한 시간씩 꿇어앉아 조만과를 바칠 정도로 집안 분위기가 독실했어요.하지만 JOC를 만나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우리 노동자에게 오실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예수님도 목수의 아들로서 노동자의 삶의 사셨잖아요. 그 당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그리고 힘들게 일하는 이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을 통해 나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됐어요. 비로소 노동의 가치와 기쁨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이미 노동자 운동가로서 삶의 궤적이 그녀 안에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박주미씨는 노동현장에서 JOC 정신을 살면서 이 땅의 민주화와 민주노조를 향한 행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79년 유신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된 부마사태가 일어났다. 그해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 5천 여 명이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단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저녁에는 부산 시청 앞에 집결하여 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 저녁,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는 확산됐고 충무파출소·한국방송공사(KBS)·서구청·부산세무소 등이 파괴되고 경찰차량도 전소 내지 파손됐다.

경찰력만으로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정부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해 1천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계엄해제를 요구했던 부산의 시민·학생 시위대는 바로 그 계엄군에 의해 진압됐지만 시위는 마산지역까지 확산됐다. 마산대학교와 경남대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민주공화당사·파출소·방송국을 타격하는 등 격렬한 시위가 전개됐고 10월 19일에는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근로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마산 시내가 한때 치안 부재의 상태가 되기도 했다.

10월 20일 정부는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등 강경책을 썼다. 이 사건은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로 확산시켰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가 무너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부마항쟁으로 야학은 침탈당했고 잠시 휴강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간첩 조작사건 부림사건이 있었는데 박주미씨는 간접적으로 연루돼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그때부터 그녀의 공장 노동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부림사건은 ‘부산의 학림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부림이라고 불렸는데,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이 이적 표현물을 학습했다는 이유로 정부 전복집단으로 매도돼 총 22명이 구속된 제5공화국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부림사건'으로 블랙리스트 올라 곤욕치루기도

“당시 여동생이 졸업하고 학교 서무과에 근무했는데 교장선생이 ‘네 언니는 빨갱이다’라고 수시로 위협했고,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엄마에게 ‘딸래미 간수 잘해라’라고 협박하기 일쑤였습니다. 오빠한테는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뭘했다고 그러는지......나는 그저 인간다운 노동자,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JOC의 정신에 따라,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노동자의 눈물과 학생들의 탄식은 가히 폭발적인 힘이 되어 군사독재 정부를 무너뜨렸다. 이어 찾아온 5공화국 신군부 정권하에서 부산은 이처럼 부림사건, 미 문화원 방화 사건 등으로 전국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된다. 그 와중에서 박주미씨의 노동 현장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된다"라는게 고인이 된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그녀도 가난을 묵묵히 감내하며 자기 일에 충실하며 착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첫 직장에서는 "천사같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그녀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대고 있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은 가난한 이들의 탓만은 아니었다. 그녀 내부에서 갈등이 심해졌다."

"태화고무에서 조장으로 일했는데 조장에게는 생산 목표량이 주어졌습니다. 전날에는 1,000족을 생산하면 됐지만 오늘은 1,100족을 생산해야 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단지 생산력을 높이는 기계일 뿐이었죠. 나는 그대로 일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만큼만 하면 됐지 날마다 어제보다 더 많이 생산해야 하는 현실을 따져 물었습니다. 윗사람들은 저를 구슬렀습니다. 조원들 편에서만 보면 안 된다. 회사의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 그게 조장의 임무다 등등. 월급은 많았지만 심적으로는 많은 부담을 느낄 때였죠."


노동자로서, 활동가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회의감이 들어 그녀는 태화고무를 그만두고 구미 공단으로 옮겨갈 계획을 세웠다. 구미 공단에 있는 어망공장은 그녀 월급의 50%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일하는 시간은 더 많다고 했다. 하루 열여섯 시간, 혹은 열여덟 시간씩 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초심으로 돌아가 구미 노동현장에서 새롭게 활동가로서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퇴직금을 받아 구미 공단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군대에서 제대를 한 오빠가 복막염으로 입원을 한 것. 그녀의 퇴직금은 그대로 오빠의 입원비로 쓰였다. 그녀는 오빠가 또한번 원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구미행이 무산되자 박주미씨는 1981년 국제상사에 들어간다.

국제상사 입사, 생활 나눔 통해 JOC 조직 활성화

"그 당시 국제상사는 노동조건이 엄청나게 열악했습니다. 뭉둥이를 들고 노무관리를 한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으니 짐작할 겁니다. 국제상사는 범일 공장이 있었고, 사상 공단에 2,3,5 공장이 있었어요. 범일 1공장에만 종업원이 2만 명이 넘었어요. 입사하기 전 범일공장 기숙사 앞에 가봤는데 쏟아져 나오는 여공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어요."

국제상사에서 생산한 남성학생화

"기숙사에서 공장까지는 도보로 5~10분 정도 걸렸는데 푸른 작업복을 입은 여공들이 지름길인 골목길을 나와 공장으로 향하는데 그 행렬이 마치 수돗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 같았다" 고 당시 느낌을 전하는 박주미씨는 짧은 시간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현기증과 함께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은 JOC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구미공단까지 가려고 하지 않았던가.

당시 JOC 회원 중 국제상사에 근무하는 투사들이 있었다. 국제상사 본부가 있던 3공장, 5공장 등은 시설이 조금 나았고 JOC 조직이 움직이고 있었다. 박주미씨는 JOC 활동가가 없는 국제상사 2 공장에 미싱사로 지원했다. 제 2공장은 건물도 가장 오래돼 낙후됐고 근무인원도 제일 많았다고 한다.

아침 8시 출근, 저녁 7시 퇴근이었지만 일을 시작하기 2~30분 전에 출근해 일할 준비를 해야 했고, 퇴근 역시 30분이나 한시간씩 늦어지기 일쑤였다. 그나마 잔업을 하면 10시까지 꼬박 열네 시간을 일해야 했다. 일도 힘들었지만 현장에는 1m가 넘는 각목을 들고 노무 감시를 하는 이들이 있었고, 생산량에 못미치면 각목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위협을 가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성실히, 열심히 일했던 박주미씨는 국제상사에서도 금새 신뢰를 받았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비춰졌던 것. 그러나 박주미씨에게는 그렇게 상사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동료들을 규합해 JOC 모임과 생활 나눔을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박주미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회합을 하고 생활 나눔을 했다. 노동자로 살아가는 생산현장에서 느끼는 여러가지 일들을 나누면서 JOC 회원들은 하나씩 늘어났고, 회원들은 서로의 처지를 공유하며 노동자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해갔다. 노동현장을 관찰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면서 회원들은 애덕을 실천하고 있는가 끊임없이 돌아보았다. JOC의 방법으로 관찰과 판단, 그리고 실천을 하면서 생활 나눔은 폭이 점차 넓어졌고, 현장에서의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는 힘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관찰하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판단하고 애덕의 실천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JOC 가르침대로 박주미씨는 소그룹 모임인 섹션을 이끌었다.

"노동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있는가? 또 그것을 얼마나 객관화시켜 판단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회합을 통해 늘 점검합니다. 그래서 JOC 회합은 고백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겪었던 불합리한 일이나 문제점 등을 다 이야기하는데, 그럴 때는 감정이 그대로 올라오기도 하지요. 그 상황을 얘기하면서 흥분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욕하기도 하면서. 그런 얘기를 우리 모두 귀기울여 듣습니다. 그 다음, 그러면 어떤 실천이 필요할까에 대한 논의를 합니다. 당사자는 그 실천사항을 현장에서 행하고 다음 주 회합 때 또 나눔을 합니다. 결국 JOC 회합과 생활 나눔은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볼 수 있겠죠. " (계속)

상인숙/ 지금여기 기자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