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노동청년회 창립 50주년 기념 연속 기획 인터뷰]

 '지금여기'는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은 한국 가톨릭노동청년회 선배 투사들의 삶을 조명하는 특별 연속 기획 인터뷰를 마련한다. 1958년 JOC를 창설한 조셉 까르딘 추기경의 방한에 맞춰 설립된 한국 가톨릭노동청년회는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태를 계기로 노동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와 교회의 주목을 받았다.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의 권익 향상과 제도 개선을 위해 활발히 활동한 시기에 JOC정신을 살며 이끌어온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들의 삶을 통해 '지금 여기'는 우리 시대의 복음 정신을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땀흘려 일한 후의 기쁨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죠. 지금 이 순간도 노동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고맙고 기쁠 따름입니다." 재봉틀을 놀리던 손을 잠시 놓고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 어디에서도 쉼없이 일하며 땀흘려야 하는 삶의 고단함을 찾을 수 없었다.

한국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JOC정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 그 삶의 이야기를 풀어보겠다는 기획의도에 따라 만난 첫 번째 인터뷰 상대는 허숙영(아녜스,50세,서울대교구 시흥4동본당)씨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연락했을 때만 해도 할 말이 없다면서 사양하기에 바빴던 그녀는 기실 인터뷰를 시작하자 지난 세월의 땀과 눈물과 애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듯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또한 그녀가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JOC를 향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투사의 모습에 다름 아닌 듯했다.

 땀흘려 일한 기쁨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노동의 신성성 강조

"지금이 오히려 JOC정신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이 땅에서 설움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갈수록 척박해지는 노동환경에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힘을 얻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함께하는 노동사목, 노동운동, 그리고 JOC운동이 펼쳐졌으면 좋겠어요. JOC운동은 평신도운동입니다. 노동자 한 사람,한 사람이 복음을 사는 것이지요. 교회는 이 땅에 오신 노동자 예수님이 아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어느 한순간도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을 놓지 않았던 허숙영씨. 그녀는 1970년대 중반, 열여덟살 때 고향 강원도 홍천을 떠나 부천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경제개발이 지상과제였던 그 당시,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을 산업의 역군이라 칭했지만 오히려 현실에선 '공돌이' '공순이'라 부르며 비하하기 일쑤였던 때였다. 그러니 노동여건이나 신분이 제대로 보장될 리가 있었겠는가.

"당시에는 공장에 다닌다는 말을 하기 쉽지 않았어요.행여 신분을 밝혀야 하는 자리가 있어도 그냥 회사에 다닌다고 말하곤 했죠. 아마 대부분 노동자들이 그러했으리라 생각해요. 사회적으로는 공돌이니, 공순이니 하면서 은근히 무시하는데 공장에 다닌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죠. 말하자면 통로가 없었다고나 할까요.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언어,즉 잔업이니 장시간 노동이니 또는 특근이니 하는 말들이 일반적이지 않았거든요."

많은 이들이 청소년기에 노동현장에 들어와 청년의 꿈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장시간 노동과 잔업에 시달린다. 인생을 설계하기는커녕 바깥 세상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이 하루하루 지친 삶을 보내게 된다. 허숙영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요일이면 미사는 갔지만 공장에 다니고 있었던 그녀는 성당 어느 한 곳에서도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그렇게 가슴앓이 아닌 가슴앓이를 하다가 초대된 JOC 교육에서 그녀는 노동자들의 언어, 그러니까 자신들의 언어를 만나 안도할 수 있었다. 잔업을 한다느니, 특근을 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고,부끄럽지 않게 자기를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좋았다.

 장시간 근무와 잔업에 지친 몸과 맘, JOC 활동에서 위로 받아

JOC 교육을 통해 '신앙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전 미카엘 신부님의 '노동자의 길잡이'를 통해서였다.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교회가 나서 해결해야 하며,그 안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활동하고 계신가를 배웠다. 그녀는 빠르게 투사로 성장했고, 지금은 동반자로 일컫는 지도 투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1976년 JOC를 처음 접했다는 그녀는 1978년부터 활동을 시작해 곧이어 투사선서, 팀모임과 섹션 회장에 이어 1983년 인천교구 JOC 회장과 1986년부터 1989년까지 JOC 전국본부 회장을 지냈다. JOC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한국사회 내의 노동운동 역시 노동조합 설립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던 시기였다.

"사회가 어수선했지요.공안정국이기도 했고, 운동권에서는 노동현장에 위장취업을 해 노동운동을 주도했고 우리 노동자들의 의식도 높아지고 있었지요. 처음엔 몰랐는데 나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어디를 가나 감시가 따라붙었고, 취업하기도 쉽지 않았어요. 물론 JOC 전국회장을 할 때는 각 노동현장의 지원과 데모를 하기에 더 바빴어요. 각 현장마다 다른 여건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했고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JOC 회장임기가 끝나고는 노동현장으로 돌아가 처음 투사선서를 한 것처럼 까르딘 정신으로 살아가기 원했어요."

첫 직장이 봉제공장이었지만 생산 사무실에 배치돼 실제 업무는 미싱을 배우기보다 자재 파악 등 사무업무가 더 많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것이 그녀가 JOC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부서 저 부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부서별 상황 파악도 용이해 동료들을 규합하기에 좋았다.

소그룹 모임이 살아야 JOC활동 또한 활발해진다. 허숙영씨는 자연스럽게 회합중심으로 소그룹을 만들어 점차 2~3개의 팀 회합을 주도하게 됐다. 그녀는 여러 팀을 양성시키면서 스스로의 역량도 키웠다. 당시에는 JOC조직이 본당뿐 아니라 생산현장, 공장단위로도 많이 결성돼 활동했다고 한다.

"JOC 활동은 내게 큰 힘이 돼곤 했어요. JOC는 노동계의 복음화, 노동자들의 인간성숙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자기 존재감을 인식하고, 사회일원으로서의 정당성을 찾는 것이기도 합니다. 80년대 초반, 노동 조합이란 말을 꺼내기조차 힘들었던 시절 800명 정도 근무하는 규모의 공장에 임금협상을 이끌어낸 적이 있었어요. 5공화국의 서슬퍼런 공안정국으로 인해 노동자들 조차 노동조합 결성을 두려워했어요. 탄압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사협의회를 만들어 사측과의 대화를 이끌어내었지요."

노사협의회를 노동조합 결성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오해받기도 했다는 허숙영씨는 당시 학생운동권에서 펼치던 노동운동이 때로는 산업현장의 현실을 감안하기보다 운동적 차원에 머무를 때도 있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학생들이 위장취업을 해서 노동자들을 의식화시키고 노동운동으로 이끌어낼 때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규모가 작은 노동현장은 그 현장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접근방식의 다양함이 필요했다고 전한다. 현장의 상황에 따라 투쟁과 기도가 동시에 필요했고 노동자 개인의 변화와 함께 사회구조의 변화도 필요했던 때였다.

"인간답지 않은 노동자,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의 조건을 말살하는 노동현장에서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곧 자기변화를 끌어내 활동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JOC는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해 주었어요. 내가 변화돼야 다른 이들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내가 변화되고, 내 주위가 변화하고, 또 직장이 변화하면서 사회가 변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노동현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변화시켜 주는 것이며, 그것이 JOC의 참가치입니다."

 JOC 뿌리는 팀 회합,회원 상호간 생활 나누기로 복음 살기 실현

언제나 투사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기를 원했던 허숙영씨, 그녀는 까르딘 추기경의 가르침대로 노동현장의 모든 것을 노동자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이끌어가는 데 힘썼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봉제공장,제약회사,자동차 부품 생산공장 등 산업현장을 전전긍긍 옮겨 다니면서도 JOC 회원들의 영성 개발과 후배 양성에 앞장섰다.

그녀는 현대의 노동현장에서 JOC활동이 둔화되고, 정체된 것이 누구보다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물론 사회가 급격히 변하고 노동현장의 현실도 많이 바뀐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선배로서 후배 양성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 또한 앞선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는 노동운동의 활성화로 노동조합 결성 등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노동운동은 활발해졌지만 노동자들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양성시키는 JOC 본연의 모습을 기르는 것에는 소홀하지 않았나 생각돼요. JOC운동은 노동운동이지만 곧 생활운동이기도 하거든요. 팀원들의 생활 나누기를 통해 사랑 나누기가 가능하고 그것이 JOC를 끌어주는 힘이 되기에 충분하거든요. 외부로 드러나는 노동운동에 치중하다 보니 내면을 다지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도가 변한다고 곧 노동자의 삶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가 변화돼야 하는 것이지요."

교회 내 노동자단체들의 활약이 너무 미미하다고 안타까워하는 허숙영씨는 한국 가톨릭노동청년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노동자들의 삶을 변화시킬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국사회에서 과거의 노동자 개념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 등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 열악한 노동환경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후배들이 이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 이 시대에 맞는 까르딘 정신을 살았으면 합니다."

노동자들 안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자로 살기를 희망하는 허숙영씨는 여전히 평신도사도직 운동의 일환으로 JOC정신을 살고 있다. (계속)


** 허숙영 **
1958년생, 1979년 JOC 투사 선서, 1983년 인천교구 JOC회장, 1987년~1989년 JOC 전국 회장 등을 거쳐 1992년 팀회합 동반자 활동까지 JOC 투사양성과 팀 양성을 위해 활동. 1992년 결혼, 대안학교 교사인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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