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노동청년회 창립 50주년 기념 인터뷰


남편은 영원한 동지처럼,딸은 친구처럼

12월6일, 매서운 추위가 온거리를 뒤덮은 날, 허숙영씨 가족을 만나기 위해 몸을 움츠린 채 그녀 집을 들어섰다. 따사로운 온기가 온 몸에 퍼진다. 그것은 비단 난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봉제공장 윗층에 소박하게 꾸린 보금자리에서 남편 염병훈씨, 딸 진아와 함께 살아가는 또하나의 작은 공동체에서 전해지는 따사로움이었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을 많이 도와줍니다.먹을 것이 있으면 이웃과 나누고 우리 가족보다 다른 가족을 먼저 챙겨줍니다. 봉사하는 마음이 크다고 할까요. 집안 살림도 하고 일도 하시려면 바쁘실 텐데 도움이 필요한 곳엔 언제든 엄마의 손길이 미치는 것 같아요.”

중학교 3학년,의젓하게 엄마를 평하는 딸 진아양은 그런 엄마가 자랑스럽단다. 아이 때문에 직장을 다니지 못하고 늘 집 부근에서 홀로 공장을 운영해왔다는 허숙영씨. 학교 갔다 오면 쪼르르 엄마 일터에 들러 하루 일과를 조잘대는 딸 진아는 그래서 마치 친구 같았다. 딸의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생각에 여느 엄마들과 달리 딸의 시간을 이리저리 재단하지 않는다. 그저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제 인생 길을 잘 헤쳐나가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런 생각은 남편 염병훈씨도 마찬가지다. 부부가 굳이 그렇게 생각을 맞추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나온 육아의 방식이었다. 어쩌면 그런 공감들이 허숙영씨와 염병훈씨를 부부의 연으로 맺어지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톨릭 노동청년회 50주년 행사에 허숙영씨 가족도 함께 참여했다. 행사 스텦으로 당일 내내 현장에서 뛰어다니는 엄마를 보며 진아양은 엄마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가득찼다고 한다.

“생각보다 엄마가 아는 사람이 많구나라고 생각했고,  행사 뒷풀이를 할 때 엄마가 회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춤추는 모습이 아름다웠다”라고 엄마 자랑을 하는 진아양은 어릴 때 엄마 손에 이끌려 JOC 팀회합에 많이 다녔다. 그래서인지 일찌감치 어른스러워진 진아양이다. “기다릴 줄 알고, 예의를 지키고, 공중도덕을 지키는 아이였다”고 딸의 어린 시절을 말하는 허숙영씨는 지금 생각하면 좋은 점도 있지만 아이가 또래 모임을 자주 접하지 못한 듯해서 미안하기도 하다. 어린 딸을 데리고 JOC 팀회합을 했던만큼 허숙영씨의 JOC 사랑은 남달랐다.

JOC가 맺어준 인연

그러고 보면 가톨릭 노동청년회는 허숙영씨의 모든 것을 잉태하게 해 준 생명줄 같은 것이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JOC 정신은 가난 속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사랑하면서 지칠 줄 모르는 삶의 열정을 내뿜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됐고, 이렇게 따사로운 가정공동체를 꾸리게 된 남편을 만난 것도 JOC 활동을 통해서였다.

현재 대안학교인 '도시 속 작은 학교' 교장으로 일하는 허씨의 남편 염병훈씨는 그녀가 JOC 전국회장을 할 때인 1989년 JOC 회보인 <노동 청년>를 만드는 홍보담당으로 들어왔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염씨는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며, 군대를 갔다 온 후 곧바로 JOC 전국본부 홍보팀에 지원해 활동하게 됐다.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허숙영씨

노동을 통한 복음 전파와 노동운동이 주된 활동이었던 JOC에 당시만 해도 대졸자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고 한다. 일종의 편견처럼 현장 활동과 동떨어진 화이트컬러라는 인식이 컸던 것. 그런 현실 속에서 묵묵히 자기 직분을 수행하는 후배 염병훈씨를 지켜보며 허숙영씨는 ‘다부지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일을 풀어가는 방식이 비슷했고 일을 편안하게 대하는 모습이 좋았다고 한다.

“JOC 본부는 일의 특성상 전국을 다녀야 했습니다.임원들이 함께 전국을 다니면서 지원도 하고 교육도 시켰어요. 서울본부에 머물 때도 거의 합숙을 했으니 가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았고, 또 함께 생각하고 함께 일을 풀어나가는 것이 대부분 우리들의 일이었으니까요. 자연 모든 사물이나 사안을 같은 시각으로,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보게 되었어요.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우리 둘을 묶어주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편 염병훈씨의 말이다. JOC 선배였고, 연상이었던 허숙영씨를 일생의 반려로 삼기에 한점 주저함이 없었다는 염병훈씨. 그것은 허숙영씨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다 할 연애감정은 없었지만 깊은 동료애가 둘 사이에 끈끈하게 형성됐고, 급기야 1992년 전국 회장단 회의에서 둘의 결혼을 발표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둘이 결혼한다고 하니까 의아하게 생각했고,또 염려도 많이 했습니다. 저는 투사선서를 하고 팀을 여럿 양성한 투사였고,염병훈씨는 <노동 청년>지 편집자로 온 사람이었기에 일반적으로 둘 사이에 괴리가 있다고 생각됐던 모양입니다. 그는 투사선서를 하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연하남과의 결혼이 그다지 시선을 끌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5살 어린 후배와의 결혼이 적잔이 우려될 수 있었을 테구요. 우리가 조금 특이하게 비춰졌을 수 있었겠지요.”

1980년대의 노동운동에 비해 1990년대는 그 힘과 순수성에서 변질되기도 했다. 더러는 노조가 이익집단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JOC 활동도 현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팀 회합과 투사 양성보다는 운동 차원으로 흘러가 내부의 힘이 조금씩 약화되는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허숙영씨와 염병훈씨는 많은 이들의 우려 속에서 화촉을 밝혔다. 그리고 그들은 가정공동체 안에서 JOC 정신을 살기 시작했다.

도덕적 압박으로, 그래서 기쁘고 새로운 시작

허숙영씨의 남편이 된 염병훈씨는 노동현장으로 돌아갔다. 학력을 속이고 지게차 운전자로 취직을 해 창고지기로 물류를 나르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동료들과도 잘 지냈다. 직장 3년 선배의 꿈이 창고지기에서 사무직으로 승진해 옮겨가고 싶어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하지만 막상 승진대상은 3년 선배가 아닌 염병훈씨였다고 한다. 동료의 꿈과 자신의 이익이 정면으로 배치되는 시점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동료 노동자보다 앞서 승진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만큼 도덕적 압박감이 컸던 것이다.

“남편은 고민을 많이 했어요.직장을 그만두면 당장 우리 가정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커질 것이고, 그대로 직장을 다니자니 자기 양심에 반하는 것이고..... 조용히 남편이 결정하도록 지켜보고 있었어요. 남편은 사표를 냈고, 나는 그것이 올바른 결정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곧이어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왔어요. 내적 자부심과 함께 말입니다. 그 선택은 우리에게는 복음을 실천하는 길이었어요.그 일 이후 남편을 더 신뢰하게 됐어요.”

노동 외에는 배운 것이 없었던 허숙영씨와 염병훈씨 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허숙영씨는 봉제일을 자영업으로 선택했고, 조금 더 늦게 염병훈씨는 비행 청소년들에게 눈을 돌려 대안학교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도 노동자들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가난에 쫒기고 사랑에 목말라 비행 청소년이란 딱지를 붙이게 된 경우가 허다했지요. 그들을 만나 상담을 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마음놓고 배우고 느끼고 나눌 수 있는 학교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장애를 안고 있어 교육에서조차 소외된 아이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도시 속의 작은 학교'는 도시에 설립된 최초의 전일제 학교다. 열두명의 아이들이 각자 자기 적성에 맞는 시간표를 짜서 학습한다. 방과 후 학교까지 합치면 학생들은 21명, 교사는 상근 교사 4명에 강사 15명 정도, 그리고 나머지 선생들은 자원봉사자들로 채워진다.

남편의 얼마 되지 않은 봉급과 자신이 봉제 일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빠듯하게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허숙영씨는 가계의 어려움보다 대안학교 운영의 어려움에 항시 마음이 더 쓰인다. 현 정부가 들어서고 국가 보조도 줄었고, 국가적 경제위기로 후원금도 적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유를 꿈꾸기에

허숙영씨는 결국 남편의 대안학교 선택은 사회적 약자인 저소득층 자녀들, 곧 노동자들의 자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사실이 그녀에게는 ‘빛’처럼 다가와 힘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허숙영씨 가족의 결속력이 된다고 한다.

“함께 살면서 우리에게는 도덕에 대한 억압이 늘 따라다녔어요. 사회적 책무감이라고나 할까요? 노동운동이 운동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 지역 안에서 생활 나눔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반성, JOC정신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로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긴장을 놓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약간의 도덕에 대한 억압은 스스로의 욕심을 걸러내고 비워내는 장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가볍습니다. 약간의 궁핍함도 가볍게 넘길 수 있고, 각자의 일상에 바빠 행여 생길 수 있는 마찰도 가볍게 넘어갑니다. 각자 자기 생활에 투신하는 것이지요. 투신하는 것은 아름다움 아닙니까? 그런 것들로 일상을 채우니 평이하고 부드럽게 흘러갑니다. 마음도,현실도... 그것은 축복이며, 우린 감사할 따름이죠.”

스스로 자유를 꿈꾸기에 남편도 딸도 자유롭게 꿈을 향해 날아오르기를 바란다는 허숙영씨. 그녀에게 소망이 있다면 훗날 여건이 된다면 노동자들의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란다. 작은 건물 하나에 노동자 생산공동체를 꾸려가며 일에 치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여정,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함께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이 필요한 것이기에 아직은 마음속으로만 품은 생각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일’은 항상 에너지원이 되기 때문에 자신이 땀흘려 하는 오늘의 노동이 머지않아 그 꿈에 다가갈 열쇠를 줄 것이라고 믿는다. 자그마하지만 다부진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소망을 한켜 한켜 쌓아가는 투지가 되는 듯했다.

딸에게, 남편에게,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행복하니?”라고 자주 묻는다는 허숙영씨. 인터뷰를 할 때도 묻는다. “진아,너 행복하니?”라고. 진아와 아빠가 하하하 웃는다. 그들은 행복하게 보였다. 아니 즐겁게 삶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노동하는 엄마, 교육 현장에서 고민하는 아빠와 함께 진아도 땀흘려 일하는 기쁨을 조금씩 느끼고 알아갈 것이다. 그들 가족을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 일상의 기쁨에 충실한 가족들이란 생각이 든다. 가족 구성원 각자의 소명을 충분히 인정하고 나눈다. 그리고 그것은 또다른 힘이 되어 가족을 감싼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해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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