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노동청년회 창립 50주년 기념 연속 기획 인터뷰]


열세살 어린 소녀, 학교 대신 공장으로..

가난 때문에 노동현장으로 내몰린 어린 가슴은 입을 앙다물고 미싱사 곁에서 일을 배워야 했다. '노동의 기쁨'이라는 말을 알기도 전에 생산 현장을 찾아야 했던 여리디 여린 손길은 눈물조차 흘릴 겨를이 없었다.

나라가 가난했고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산업화의 물결이 거세게 불었던 1970년대 초, 소녀 박주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3일 만에 스웨터 공장의 문을 두드렸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 위암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살림이 더욱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불편한 몸으로 변변히 일도 못하는 엄마, 장남이기에 공부를 해야 했던 오빠... 이같은 현실 속에서 언니와 어린 주미는 가장을 대신해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어린 소녀 박주미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그렇게 생산현장에 발을 디딘 그녀는 메리야스 공장, 신발공장 등 노동현장을 옮겨다니며 기술을 익혔고, 또한 노동의 의미를 깨우쳐갔다. 돈을 벌면 중학교에 가겠다고 아침마다 다짐했고, 틈만 나면 엄마를 조르며 울었지만 현실은 결국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중학교 졸업장 대신 여린 손끝에서 익힌 기술로 점차 미싱 기술자로 경력을 쌓았으며, 배우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틈틈이 책을 읽으며 야학을 다녔다. 그러면서 가톨릭 노동청년회(JOC)와 만났고 그녀의 의식은 성큼 자라게 된다.

JOC 만나 아름다운 노동자로 변해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고, 그리고 부산의 산업현장을 지키며 살아온 前 JOC 부산교구 회장 박주미씨(막달레나). 긴 세월 동안 그녀는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온화하게 온몸으로 노동자의 권익향상과 노동자 개인 성화를 위해 투신했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박주미를 있게 한 JOC의 정신이기도 했다.

13살 어린 소녀시절에 시작되어 인생길 반백의 세월을 넘긴 오늘까지 그녀의 삶을 차지해버린 노동의 시간들은 과연 어떤 의미를 던져주었을까?

"누가 나에게 지난 세월을 묻는다면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아쉬운 시간들은 있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스스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해요. 우습지요?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인생에 대해 만족하고 성공했다고 하니까 말이죠."

말을 끝내고 까르르 웃다가 멋적다며 이내 웃음을 거두는 그녀. 부산지역 노동투쟁의 현장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부산지역 노동자운동과 JOC의 산 증인이자 역사였다. 그녀의 작지만 단단한 발걸음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해 노동자들과 함께 나아갔고,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걸맞는 운동으로 끝없이 새 옷을 갈아입으며 지금 여기, 오늘까지 이어져 온다.

"22살 때 집을 나와 JOC 회원들과 공동생활을 시작했어요. 사상 공단, 개금과 가야에서 공동체를 만들며 노동자들과 함께 했지요. 마흔하나가 될 때까지 20여 년을 그렇게 살았던 거지요. 아마 함께 숨결을 나누고 꿈을 나누며 생활한 이들이 50명은 족히 넘을 겁니다. 전국 팔도에서 부산에 일하러 온 노동자 동지들과 그렇게 산 시간들이 어쩌면 내 삶의 원천이 되었는지도 모르죠."

초창기 함께 생활했던 가톨릭 노동청년 7명과는 지금도 형제처럼 정을 나눈다는데. 이제는 엄마가 되거나 또는 혼자 살면서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그녀의 JOC 동지들. 그녀들과 만날 때 박주미씨는 청년 노동자로 돌아가 그 때의 아픔에, 그때의 열정에, 그 때의 성취에 흠뻑 취하기도 한다. 그만큼 JOC 회원들과 함께한 세월은 그녀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총회에서 (중앙의 검정외투 입은 박주미씨)

정치보다는 운동이 제 격이죠

박주미씨는 1982년부터 1986년까지 부산교구 가톨릭 노동청년회 회장을 지냈으며, 1989년에는 부산교구 노동사목 창립멤버로 참여해서 교구 노동사목의 기틀을 잡았다. JOC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출발한 새로운 활동이었다. 그리고 2002년부터 지난 2006년 6월까지 민주노동당 부산광역시의회 비례대표 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하기도 했다. 노동자의 손으로 노동자의 삶을 바꾼다는 민주노동당의 뜻에 이끌려 마지못해 나간 시의원 선거였지만, 그 삶의 방식대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복지분야에서 길을 열어갔다.

2006년에는 민주시민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그녀가 가는 곳엔 늘 기삿거리가 있다는 말이 생길 만큼 발로 뛰는 의정활동을 했다. 임기가 끝나자 그녀는 미련없이 정치판을 떠나 다시 교구 노동사목 현장으로 돌아왔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몇 가지 중요한 전환점들이 있었어요. 진짜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명분에 밀려서 선택해야 했던 몇 가지 일 중에 하나가 시의원 출마였지요. 주변에선 내가 부산지역 노동현장에서 이리저리 누비고 다니다 보니, 연배로 보나 노동운동의 경력으로 보나 후보로 적격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당선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죠. 그때까지 시청에도 한번 가보지 않은 사람이 시정활동이라니... 하지만 열심히 했고, 즐겁게 일했습니다. 잠시의 외도이긴 했지만요. 다시 교구 노동사목에 돌아와서는 새 판을 짜야 했습니다. 변화하는 노동시장과 사회현상과 맞물려서 이제는 노동자의 인성교육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외받은 이들의 울타리, 바자울 배움터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에 있는 가톨릭센터 5층에 부산교구 '직장 노동사목'이 자리잡고 있다. 가톨릭노동문제상담소와 가톨릭이주노동자센터가 들어서 있는 이곳에서 박주미씨는 '바자울' 배움터를 열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바자울'은 '대나무, 갈대, 수수깡 따위로 발처럼 엮어 만든 울타리'라는 뜻을 가진 순 우리말이다. 이 '바자울'이란 말 뜻 속에는 '직장 노동사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튼튼한 울타리가 되자는 다짐이 포함되어 있다.

바자울 배움터는 주로 에니어그램, 파트너십, 예술심리치료 등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둘러싼 ‘관계’ 안에서 참된 자아를 찾도록 돕는 인성교육센터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성교육은 비용이 많이 듭니다. 바자울 배움터는 인성교육의 문턱을 낮춰 노동자들이 인간의 본성에 더 쉽게 눈을 떠 그리스도인으로서, 혹은 자연인으로서 내적 여정을 알차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프로그램을 운용합니다. 힘겨운 노동현장 속에서 자기 삶과 깊은 차원에서 만나는 것이라고 할까요? 개인적 어려움은 물론 지금 경제한파가 몰아치는 사회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힘을 주는 희망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현재 민주노총 교육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박주미씨는 민주노총에서 이미 하고 있는 노동조합 실무교육과 다른 측면에서 노동자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교육에 바자울 배움터 프로그램을 접목시킬 계획이다. 이는 그녀의 모태가 되어 주었던 JOC의 정신처럼, 노동환경 등 물질적 조건의 개선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인간성과 영성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그녀의 갈망이 닿은 곳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숨가쁘게 달려왔지만, 이제 투사의 삶을 살며시 내려놓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차분히 앉아 바자울 배움터 교육 실무자로서, 지역 노동자들의 속사정을 들어주고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게 그녀의 몫이 되고 있다. (계속)

** 박주미(막달레나) **
1958년 부산생, 1984년 가톨릭 노동청년회 부산교구 회장, 1989년 부산교구 노동사목 창립멤버,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민주노동당 부산광역시의회 비례대표 의원, 2007년부터 현재까지 부산교구 노동사목 부설 바자움 배움터의 실무를 관장하며 ‘노동자들이 웃는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민주노총 교육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상인숙/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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